문화류씨

[스크랩] 류차달의 이름에 대한 연안차씨의 주장과 그 허구성

ryu하곡 2015. 7. 19. 12:54

"연안차씨 대동보 백서 부록"이라는 책과 "의덕사: 연안차씨 사우"라는 책에는

류차달의 이름에 대한, 제목만 조금 다른 같은 글이 쓰여 있다. 전자의 제목은

"'류차달'이란 기록 중 '차달'이 이름이라 한 것은 큰 잘못이다"이고 후자의 제목은

"'류차달'이란 기록은 잘 못된 것이다"이다. 이런 주장은 이 두 책뿐만 아니라

차문(車門)의 족보와 홈페이지 등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 주장을 살펴보고 그 허구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아래에서 스캔한

부분은 차문의 주장이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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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차달'이 호이고 대승공의 이름은 '해(海)'라는 암시를 하고 있는 글이다.

그리고 류차달이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잘못해서 ("이름과 호를

혼동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차문의 다른 주장을 따르자면 왜곡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보이는 몇 개 사실을 지적한다.

 

- 호는 고려 후기에 발달하기 시작해서 조선 시대에 유행한 것이며 고려 초기에는

호를 사용한 사람이 없다.


- 대승공의 성명 류차달은 고려의 후기의 금석문 여러 개에 이미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 대승공의 호와 초명이라고 하는 이름 해(海)는 임진왜란 직전부터 세상에 나왔다.

그것도 '해'는 '초명'이라 나와 있다.


- 임진왜란 직전에 등장한 것이 확실한 차원부설원기에서 이런 주장이 처음 나왔는데,

차원부설원기는 명백한 위서(僞書)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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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차씨가 신라태조의 사성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차씨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는 당시의 기록이 전무하다. 물론 차원부설원기 등이

만들어낸 원파록이나 조선 중기 이후의 문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려사에도

차씨들이 몇 명 나오지만 중국사람도 있고, 연안인 혹은 관련 있는 지명의 사람(연안인,

영흥인, 염주인, 등)으로 직접 명시해 놓은 것을 난 찾지 못했다. 다만 이런 구절이

가장 가깝다. 고려사 염주 항목에, "縣人將軍車松祐 현(당시 영응현이었음) 사람

장군 차송우". 이런 지경이니 어떤 근거로 차무일을 득성시조 운운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설원기나 원파록에도 비교적 그 원 형태를 믿을 수 있는 초기 버전에 따르면

어떤 왕씨가 참언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이름을 바꾼 것이다. 북쪽에 살았다는

그 왕씨와 남쪽 끝에 살았던 신라태조(신라도 태조라고 하나?)와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이름(류차달의 차달)에 성(차)을 쓸 리가 없다고 말한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류차달은 애초부터 차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씨가 없다가 성씨가 생긴 것이다.

고려사의 초기부분을 봐도 알 수 있는, 성씨의 발달사에서 고려초에 폭발적으로

생겨난 많은 성씨들을 보면 명약관화한 일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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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왕씨 족보?! 음, 절하고 봐야 하나? 개성왕씨 족보는 숨죽이고 살던 왕씨들이

조선 후기에 조선의 국운이 왕성하고  고려조에 대한 경계심도 충분히 늦추어졌고

온갖 문중들이 족보를 만들기 시작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사의 내용,

문화류씨와 연안차씨의 그 차원부설원기 등의 영향으로 조작된 원파록, 그리고 당시

모을 수 있던 왕씨 사적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처음에 이것을 근거로 내세운 것은

아직도 사대주의나 권위주의에 젖어 있음을 반증하지만,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을 제1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1 2 3도 셀 줄 모르는 소치이다.


왕씨 조상이 차씨라는 주장은 원파록 자체에도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더구나

왕건의 조상에 대해 알아내려고 고려시대 당시에 석학들이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를

한번 "고려사"에서 살짝만 들여다봐도 그런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조선의 이성계의 선계도 그 위로 몇 세대 올라가지 못한다.

설원기와 원파록이 위작(僞作)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에 개성왕씨 족보는 물론 그것에

의존했거나 일부를 가져다 쓴 다른 족보들도 모두 새로 써져야 한다. 하루 빨리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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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의 근거는 무엇인가? 차원부설원기이다. 그리고 설원기는 명백히 위서(僞書)임이

판명되었다. 이것은 설원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모든 역사학자들 마다 반드시

내리는 결론이다. 뭔가 깊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설원기에서조차 절대로 류씨를 사성 받았다고 쓰지 않고 있다. 자신들의

바이블조차 무시하니, 글씨나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인지 의심이 간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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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류차달이란 이름을 조선조에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요즘 서점에도 나와

있는 "고려금석문집성" 같은 책을 제발 한 번이라도 떠들어보길 바란다. 차씨들이

하나도 안 나오니 떠들어볼 기분이 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한 집안을 대표하여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런 정도의 수고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집안의 생각 있는

다른 분들이 보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이런 책은 여러 종류이다. 도서관 가면

대여섯 가지는 있다. 금석문의 가치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고려조에 ...역적으로 처형..."이란 말은 처형되기 전에 가소로워 웃다가 죽을 문장이다.


설원기에서는 차원부라는 인물을 극도로 찬양하기 위해서 고려의 절사(節士)였음을

강조에 강조를 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성계를 음(陰)으로 도와서 결과적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게 한 가장 위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 그려져 있다. 뭐가 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고려 개국공신의 후손들이 조선조에 무슨 박해라도 받은 역사가

하나라도 있는가? 그것도 개국공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고려말의 신하들도 대거 중용하던 판에, 개국공신 자체도 아니고 그 까마득한 후손들이

어땠다는 말인가. 물론 왕씨 자신들은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도 어떤 왕이

집권하면 자신의 계보를 지키기 위해 이런저런 핑계로 골육들조차 제거했다. 그게

바로 왕권정치, 아니 정치의 속성이다. 그런데 몇 백 년 전의 개국공신의 후손을

조선조에서 죽이려 했다니?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 와서야 류차달에 관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다. 소설도 잘 쓴다는 생각이 든다. 차문이 언제 역적으로 휘말려 살았는가. 설원기에서

70여명이 하륜 등에 의해 죽었다고 하나 그것도 자세히 읽어보면 차씨는 대여섯 명이다.

옛날 그 서슬퍼런 시절에도 아무리 누가 역적으로 몰려도 그 아비, 아들이 연좌해

죽었을 따름이다. 또 많은 경우는 정말 왕권에 도전하는 대역죄인인 경우가 아니면

당사자들도 사면되고 복권되었고 곁가지의 사람들은 큰 영향 없이 정계에 복귀해서 그

능력에 따라서 큰 활약을 한 경우도 많다. 더구나 역적이고 아니는 정치적인 것인데,

사가(私家)의 족보하고는 또 무슨 관련이 있었다는 말인가. 도무지 개념이 서지 않는

말들만을 늘어놓고 있다. 또 하륜 등이 죽였다고 하는 부분은 살펴보면 볼수록 엉성하다.

한 예를 살펴보면 이미 죽은 자가 그들을 죽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륜 등의 출신에

대한 묘사도 근거가 없다. 오직 말만 난무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이후에는 왕씨들조차 족보도 맘대로 만들었는데, 누가 막았다고 무슨

저런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위서를 만들고 그것을 조금씩 부풀리고

또 부풀려온 것이 저들이다. 사(邪)를 선(善)으로 포장해도 너무하다.


과감히 고쳐 정리할 것은 설원기와 원파보와 그에 입각한 모든 왜곡들이다.

그리고 제발, 위서(僞書) 설원기만 자꾸 얘기하지 말고, 엄밀하게 제대로 된 문헌을

하나라도 제시해 주길 간곡히 부탁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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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건 교수는 고려시대 후기에 문벌로 성장한 몇몇 가문들이 시조들의 이름을

왜곡 해석하여 그럴 듯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붙였다고 하면서 그 예 가운데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도 넣고 있다. '차달'이란 이름을 적절이 해석해서 소설을

썼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것에 전적으로 승복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거꾸로

생각할 수 있는 개연성도 높다는 사실 때문이다. 고려사의 맨 앞부분과 열전을

조사해보면 사람 이름이 성도 없이 순 우리말식으로 나오다가 바로 뒤에 성을 갖고

한문식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여럿이다. 라말려초는 성과 명이 한꺼번에 정착되던

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 이름이 아무 뜻 없이 지어진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그 인물의 활약, 역할, 특성 등과 연결되어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게 들린다. 더구나 문화류씨는 명망 있었던 인물인 중흥시조 류공권이

12세기에 등장했고, 류차달은 그의 6세조에 불과하다. 車와 達이라는 한자에 어울리는

어떤 인물이었음을 의심할 근거는 없다. 그리고 왕건은 호족들을 등에 업고 등장한

왕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아주 많은 호족들과의 관계를 세웠다. 고려 왕조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항시 호족 세력을 무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초에 등장한 수십 개의 성씨들은 많은 경우 왕건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한 부분으로서 그 이름들이 왕건이 지어준 것이라거나 왕건과 관계있는

것이라고들 한다. 상황적으로 보면 그런 일들이 없었을 확률 보다는 있었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는, 아니 그것을 조작한 위작자들은 또 바로 그 이름을

노렸던 것이 분명하다. 車자가 들어 있으니까. 그리고는 주도면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우선 독자 효금만 있는 대승공의 아들에 장자라고 효전이라는 인물을

올리고 대승공의 활약으로 수 백 년을 내려온 이야기를 살짝 구부려 효전의 공로인

것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나중에는 전적으로 효전의 공로인 것처럼 꾸며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을 조선 중기에나 터트리려니 뭔가 묘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용한 것이 사육신 사건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설원기이다. 장황한 고려말과

조선초의 역사를 집어놓고 태조와 태종 사이의 이야기나 방원(태종)의 일화 같은

것들을 적절히 이 장면 저 장면과 등장인물들에게 이리붙이고 저리붙이고 살아 있었을

때의 사육신들을 위시한 온갖 고위직 신하들을 참칭하여 이야기를 구성했다.

증거? 하나만 대기로 한다. 이미 다른 글에서 아주 자세히 설명한 것이지만.


차원부설원기는 본문의 저자가 박팽년이라고 못박혀 있다. 그 본문의 끝에는

세조 2년 5월 17일에 자기 직책이 형조참판이라고 밝히며 자신의 이름을 명기한

박팽년이 "싸인"이 들어 있다. 그리고 왕에게 그러니까 세조가 아닐 수 없는

왕에게 신하로서 충심으로 그 책을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며칠 있으면 칼로

그 세조를 베려고 하늘의 기회를 노심초사 엿보고 있던 박팽년. 자신을 결코

세조에 대해 臣이라 쓰지 않고 巨라고 썼다는 박팽년. 그런데, 이런 명백한 정황도

그가 100% 본문은 쓴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기대하시라. 그런

증거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곧 5월 17일 당시에 그는 이미 두 주 전에 일이 없는

한직인 중추원부사로 밀려나 있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박팽년이 자기를 한직으로

밀어낸 임금이 미워 그를 능멸하고자 자기의 직책을 예전 직책으로 밝혔을까?

아니면 자신의 직책도 모르는 천치였나? 박팽년이 "싸인"한 것일 리 없음은 누가

봐도 명명백백한 일이다. 차원기설원부는 위작(僞作)이다.


따라서 위의 주장은 그런 박팽년 선생을 극도로 모욕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부터 다음 항목의 시작까지는 다 조작된 얘기들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꾸며진 것들에 대한 해석 자체 또한 얼마나 엉터리인지 지적하고자 한다.

공연히 애꿎은 시간을 축내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위 글에 이런 한문구절과 그 번역이 나온다.


   "其子孝全은字爲生字나別賜姓氏不是他意也는以其長而承襲上祖之弘烈也라"(윗글)

   "其子孝全字爲生字別賜姓氏以其長而承襲上祖之弘烈也"(원파록)

   "그 아들 효전(孝全)은 글자 생자(生字)를 성씨에 내리지 않고 다르게 전(全)으로

   한 뜻은 그 맡 아들로 ...."


'맡 아들'은 맏아들일 것이고, 이 번역이 잘못되어 있음을 먼저 지적한다. "차효전의

이름과 차원부설원기의 변천"이라는 글에서 이미 위 문제를 다루었지만, 원본의 형태를

가장 가깝게 갖고 있는 원파록과 비교해 보면 ''자를 처리하기 곤란하니까 편의에 따라

삭제해 버렸다. 윗글의 문장은 설원기 필사본의 글이다. [초록색으로 표시한 자는

국역 설원기에서는 念자로 읽고 해석하고 있다. 필사본에서 전후의 페이지들에서 20개쯤의

念자의 글씨 형태를 확인했는데, 이 부분에 쓰인 글씨와 확연하게 달랐다. 이 글씨와

孝全의 全자와 형태가 똑같고 다만 옆에 선을 그어놓은 부분이 다르다. 그것은 실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G222에서 之자를 乏자처럼 써 놓은 예도 발견되었다. 으로

읽어야 맞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全자는 그 부근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설원기 앞부분의

全자는 전혀 흘림 없이 써 놓았다. 아래에 해당 부분만 오려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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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

   "其子孝全全字爲生字別賜姓氏不是他全意也以其長而承襲上祖之弘烈也"(필, G215)

   "그(류차달)의 아들 효전, '全字爲生字', 별도로 성씨를 하사했는데, '不是他全意也',

    그 장자로 하여금 윗대의 위대함을 이어받게 했다."


'字爲生字'는 '全字爲生字'에서 全자를 무단으로 삭제한 것이고, 설원기의 앞부분과

명백하게 내용적으로 충돌하고 있어 문제가 된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무단

삭제의 행위이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의 류차달의 묘사의 特贈車達之號부터

시작해서 그 주체는 고려태조 왕건이다. 우선, 全자가 生자로 되었다는 위 문장은

아무리 봐도 논리적이지 않다. 한편 이 문장에서는 누가 바꾸었건 간에 이름이 바뀐

것은 사실로 지적되어 있다. "不是AB"는 "A가 아니라 B"라는 뜻의 전형적인 구문이다.

"별도로 사성한 행위"가 그 주어이고, 결국 그 결과로 조상의 위대함을 이어가게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不是他全意也(...가 아니라)고 했는데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 말일까. 여기서

全을 念이라 보면 '다른 뜻이 아니라 바로...'라는 강조의 구절이 되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全자이고, 他자가 들어가서 뭔가 그 숨은 뜻을

암시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여러 가능성을 고찰해 보았는데, 어떻게 해석해도 무리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설원기 앞부분에 나온 全자가 '人王(인왕)'이라서 효전이

참언(讒言: 거짓 꾸며 남을 헐뜯는 말)을 입어 불행을 당했다는 이야기와의 관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곧 왕건이 차씨를 사성했는데 그 안에는 무슨 임금 같은 뜻은 전혀

없고 다만 옛날 차씨였던 조상을 이어가라고 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왕건이 별도로 성씨를 하사했는데, 그것은 다른 全의 뜻 곧 '人王'(임금)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장자로 하여금 윗대의 위대함을 이어받게 한 것이다."


첨언하자면, 설원기의 시의 주석은 설원기의 본문과 그 주석을 직접 보면서 단 것으로

보이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해석은 최소한 그 부분에서는 큰 무리는

없다. 다만 여전히 全字爲生字는 生字爲全字를 잘못 쓴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위의 차문의 해석 "그 아들 효전은 글자 生자를 성씨에 내리지 않고 다르게 全으로 한

뜻은 ... 하라는 것이다" 운운은 원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원파록의 全字爲生字의

全자를 무시한 필사본 글의 해석이라 문제가 되고, 더구나 그 상태에서 본다 해도

字爲生字를 "글자 生자"로 해석하고 있는데 爲자도 완전 무시한 엉터리 해석이고,

不자를 '...別賜姓氏不'로 붙이고 '是他全'을 나누어 해석한, 어떻게 이렇게 상상력이

뛰어날까 할 정도의 감탄이 나오는 해석이다.


그런데 왕건도 참 할 일 없다. 새로 건국한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 그 효과적인

통제수단의 하나로서 온갖 지방의 사람들에게 성을 나누어 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 어떤 특정한 성씨의 몇 대 조상이 어떻고 세세하게 관심을 가져 저런 말을

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연안편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토성(土姓)이 7이니, 송(宋) . 이(李) . 홍(洪) . 고(高) . 강(康) . 전(田) . 김(金)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정(鄭)이요, 촌락성(村落姓)이 2이니, 차(車) . 노(魯)요, 속성이

   3이니, 단(段) . 황(黃) . 최(崔)이다."

또 브리태니커 사전에 보면 촌락성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고려) 군현의 읍치(邑治)를 본관으로 하는 성은 지배층에 속했고, 촌락성이나

   향 . 소 . 부곡성 등은 국가에 대한 조세 . 공부(貢賦) . 역역(力役) 등의 부담을

   져야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아마 판단은 저절로 될 것이다.


또 위에 승습(承襲: 이어받음)을 확대해서 한 대도 끊이지 않고 이어가라고 했다는

뜻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A-6-5-4-3-2-1-B라고 하자. A가 차씨이고 6과 5는

차씨에서 류씨로 스스로 바꾼 사람들이다. 그리고 왕이 B한테(이때는 B도 분명히

류씨였다) 윗대를 '이어서' A의 씨로 다시 바꾸어라, 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게 B에게

6에서 1까지 네가 다 바꾸라고 하는 말로 들리는가? 여러 가능성을 모색한 다음

그중 가장 적절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번역이다. 자기주장에만 맞추어 구부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황경원의 기축보 서문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본 연안차씨강렬공후효평파보에는

이전 족보 서문이 여럿 나오는데 기축보라는 것은 들어 있지 않았음) 다른 말은 할

수가 없고, 무엇을 증명하는데 족보를 들이대고 있다. 족보고 뭐고 왕명으로 만들었다는

책까지 위서(僞書)이고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족보를 들이댄다. 서문들은 누가 썼건

간에, 한결같이 차원부설원기의 주장을 쓰고 황제(黃帝)와 삼한갑족 운운 하고 있는데,

서문에서 직접 밝히고들 있지만, 차씨 족보를 보니 그렇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석글

하나라도 써 보았는가? 남의 가문은 물론 심지어 자기 가문에 대한 글을 쓸 때도

제시되거나 전해 내려오는 글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대부분인 그 과정이 어떤지 모른다면

여기서 족보를 들이대는 무모함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류차달(柳車達)의 '차달'을 왜 '거달'로 읽지 않느냐는 강짜를 부린다. 그럼 왜 차씨는

거씨로 읽지 않는가? 삼국사기에 車得公(車得令公)이 나온다. 뭐라고 읽을 것인가.

학자에 따라서는 거득공으로 읽기도 하고 차득공이라 읽기도 한다. '차'나 '거'는

수레라는 의미의 車를 읽는 우리의 두 가지 방식이다. 중국에도 두 음이 있었고 대략

둘 다 우리 '차' 발음과는 달리 혀가 입천장에 붙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차, 츠, 즈, 거

등을 읽어보라. 어떤 소리가 나는가. 그래서 두 음이 생긴 것이다. 수레 거, 수레 차.

완전 같은 뜻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일반명사도 그렇지만 특히 고유명사는 어떻게 읽는지는 당사자의 고유권한이며

관습이다. 류차달은 류거달이 아닌 것이 그 이름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차씨가 거씨로

내려오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 관습이 붙지 않은 것 중에는 車得公처럼 후대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 그 후손이나 누가 계속 그 이름을 불러왔다면 하나로만 읽힐

것이다. 류차달로 읽는 것은 문화류씨 집안이 고려초부터 류차달로 불러왔고 또

그것은 물론 시조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칭했기 때문이다.


양곡 운반, 수레 동원 등의 얘기가 온전히 효전에게 붙은 것은 그것 자체로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에서 날조된 얘기이다. 그것이 나오기 전에 어디 한 마디라도 효전이란

인물의 얘기가 있었고 그 공로라는 얘기가 있었는지 하나라도 근거를 보여주길 바란다.

위서 설원기에서도 류차달의 공로를 명확히 밝혀놓은 터에 (위에 제시된 구절의

앞부분, "말이 비록 양식 운반의 공으로 특별히 차달의 호를 주었다 하나..." 운운에서

누가 양식 운반의 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가. 효전이 무슨 역할이라도 했다고 되어

있는가?) 18세기 초부터 효전만 내세우기에 급급하고 지금은 그게 부족해서인지

류차달도 차씨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아들이 아비가 되는 가소로운 일이다.


대광지백, 식읍천호, 일등공신 등의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만 언급하겠다:

차효전의 역사는 위서(僞書) 설원기와 원파록 외에는 전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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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말한 것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일일이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근거로 나온 것은 위서 차원부설원기와 원파록이다. 이 글의 주제인 류차달에

관한 차문(車門)의 주장은 여기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나의

이 글의 결론이다.


'합당한 번역'은 참 잘한 말이다. 그러나 문헌에서 조금 곤란하다고 글자도 삭제해

버리고 왕의 이름도 마구 바꾸어버리고 서문의 저자도 이 사람으로 했다가 저 사람으로

했다가 하고 그 중요한 본문을 썼다는 사람이 절대로 본인일 수 없는 등의 명백한 증거들

앞에서 무슨 뻔뻔한 소리인지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한문 해석은 글자 몇 자밖에 모르는

내가 봐도 치졸하고 엄밀하지 않을뿐더러 완전 견강부회식으로 하는 번역들이 다수 눈에

띈다. 제발 스스로의 말대로 역사를 고쳐 정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후기


저는 한 마디 하려 해도 확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기억력이 나빠 글 하나를 쓰려 해도 이것저것 계속 뒤적이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합니다.

과학과 공학이라는 전문분야의 덕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개 조심스럽게 표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그 점에서는 독자의 양해를 구합니다. 이 글은 직접적인 표현들을 동원한

주장들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략이나마 그 자구(字句)들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무슨 학술 논문 같이 정색(正色)을 띠는 표현을 쓰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차문(車門)에서는 10여년 전에 뿌리공원 비석에서 류문(柳門) 모독(좋은 말이 아니어서

쓰고 싶지 않지만 이 말밖에 맞는 말이 없습니다)하기 시작해서 류문에서 엄밀한

문헌 제시를 통해 류씨와 차씨가 관계 없음을 선언한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모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발 그만 하길 바라겠습니다.


저는 간혹 차문(車門)의 상황이 참 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류문(柳門)이야 시조 위의 어딘지 이상했던 거짓 역사를 털어내는 일일 뿐이지만

차문(車門)에서는 어디에서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난제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이런 말도 그릇된 가문 의식과 인간 차별 의식을 반영하는

말일 지도 모릅니다. 한 가문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절대 그 할아버지들의 벼슬 유무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래로는 개개인의 존엄성을 높이고 위로는 사회 전체의 복리를

추구하느냐의 여부에 있습니다. 한 가정이 세대를 이을 자녀들을 잘 길러내고 사랑을

담아내는 그릇이듯이 가문은 그 구성원들을 잘 교육하고 선도하고 대를 이은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게 하는 큰 그릇입니다. 거기에는 거짓이나 허세나 배타성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 다른 글에서 자세하게 고찰한 내용들이지만 혹시 이 글 내용에 대해 추가

질문이나 의견이나 증거 요구 같은 것이 있으면 해주시길 바랍니다. 차씨 분들도

물론 대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 6. 21.

채하 류주환

출처 : 물고기와 물병
글쓴이 : 은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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