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한 위인을 만나다>. 오늘 만나 볼 두번째 주인공은 바로 현대의 어떤 정치인보다도 인권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던 하정 류관 선생입니다. 오늘날까지 그의 청빈함과 애민정신은 내려오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오늘은 류관 선생에 대해 함께 알아볼까요?
'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 초기 세명의 청백리'라는 뜻으로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류관(柳寬) 등 세분을 일컫는 말인데요. 이 가운데 황희와 맹사성은 어린이 위인전으로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고 영당(황희)과 고택(맹사성) 등 그 유적지를 찾는 발길도 끊이질 않고 있죠.
상대적으로 류관 선생은 앞의 두분과 마찬가지로 정승까지 지내며 청렴하게 살았음에도 이름조차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류관 선생의 청백리 정신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시나요? 서울 청계천 주변에 하정 류관 선생의 정신이 깃든 명소가 곳곳에 있답니다. ^^
● 청렴함과 애민정신으로 백성을 돌보다. - 하정 류관 선생
류관 선생은 자 몽사(夢思)·경부(敬夫). 호 하정(夏亭). 초명 관(觀). 시호 문간(文簡). 고려 명종 때의 문신 공권(公權)의 7대손이며, 삼사판관(三司判官) 안택(安澤)의 아들입니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전리정랑(典理正郞)·전교부령(典校副令)·성균사예(成均司藝)·사헌중승(司憲中丞)을 역임하였죠.
1392년 조선이 개창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어 신왕조에 참여하였고, 1397년(태조 6)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대사성, 이어 형조전서·이조전서 등을 지냈습니다. 1400년(정종 2)에는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옮기기도 하였죠. 류관 선생은 유교사상에 입각한 정치와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에, 1401년(태종 1) 대사헌이 되어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어 간관을 탄핵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문화에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류관 선생은 사면되고 1406년 공안부판사(恭安府判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1409년에는 예문관대제학으로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를 겸하여, 이듬해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1418년(세종 즉위), 다시 예문관대제학으로 경연지사(經筵知事)를 겸하였고, 1423년 다시 춘추관지사를 겸하여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한 《고려사》를 개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듬해 개찬작업을 완료하였죠. 1426년, 우의정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1433년 세상을 떠나 경기도 양평군 강하리에 부인과 합장되었습니다.
하정 류관 선생은 성품이 소탈하고 청렴결백하여 황희(黃喜)·허조(許稠)와 함께 세종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꼽혔습니다. 평생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에 능했죠. 황해도 문화에 있는 정계서원(程溪書院)에 제향되었죠. 저서로 《하정유집》이 있습니다.
● 하정 류관 선생의 청렴 일화 1. 청렴함과 애민정신
하정 류관 선생은 관직에 있을 당시 죄인에 가한 무리한 고문을 폐지했고, 궁정에서 잔치를 벌이고 술 마시는 것을 금했으며, 허례허식을 폐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당대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출퇴근 시 수레나 말을 쓰지 않고 지팡이를 써 걸어다녔으며, 초가집 한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집과 관련된 일화로, 류관 선생은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으나 가진 것은 단지 초당 한 칸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장마에 비가 새어 공이 우산을 받치고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고, "우산없는 집은 어찌 견디겠소?" 라고 물으니 부인이 "우산없는 집에는 반드시 덮을 것이 있겠지요." 라고 대답해 공이 웃었다고 합니다.<필원잡기>
집에 있어서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언제나 경서와 사기로서 스스로 즐겼다고 하며, 남이 청렴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마치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것 같이 생각하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청렴한 위인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 하정 류관 선생의 청렴 일화 2. 세종대왕의 하사품
류관 선생은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았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호미를 들고 채소밭에서 김도 매고, 벌레도 잡았다고 하죠. 이는 그가 정승으로 있을 때에도 하던 일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류관 선생이 대감 벼슬자리에 있는 동안에도 그를 위하여 자주 음식과 물건을 보내어 그의 공을 치하했으나 임금이 보내는 맛있는 음식과 귀한 재물은 하루를 넘기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임금께서 어찬(임금이 내리시는 음식)을 내리시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열었고, 아무리 귀한 임금의 하사품 일지라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나 언제나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내주었다고 하죠. 그런 류관 선생의 성품을 잘 아는 세종은 더욱 자주 하사품을 내렸다고 합니다.
●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청백리의 얼
하정 류관 선생은 유훈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사물은 청백이니 대대로 서로 이어 끝없이 전한다." 항상 청렴결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류관 선생. 그의 청렴함은 오늘 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 청계천 비우당교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하정로 ⓒ아시아경제
현재 청계천로에서 분기된 ‘청계천로3길’과 천호대로에서 분기된 ‘천호대로5길’로 부여돼 있는 두 개 도로구간을 통합, ‘하정로’로 도로명을 부여하고 ‘하정로’에서 분기되는 ‘길’ 급 도로명 6개를 부여했습니다.
새롭게 부여하는 ‘하정로’ 구간 시점에는 ‘비우당교’가 있는데 이는 나라에서 녹봉을 받아 마을에 다리를 놓고 아이들에게 붓과 먹, 벼루 등 학습도구를 구입해 지급하는 등 청렴한 하정공 유관 선생을 기념하는 다리입니다.
하정로와 비우당교 외에도 우산각공원('우산각(雨傘閣)'이란 류관 선생이 살았던 집의 이름이며, 본래의 우산각은 이 자리가 아니라 지금의 낙산공원 입구(종로구 창신동)에 있었는데 매우 허름한 초가집이었다고 합니다.)과 훗날 선생의 6대 외손인 지봉 이수광이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비만 가린다'라는 뜻으로 지은 '비우당(庇雨堂)'이 있습니다. '비우당(庇雨堂)'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훼손되어 사라졌으나 1996년 복원되었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fine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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