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이목동 유래

ryu하곡 2014. 11. 8. 02:10

모산 12동네 청룡 송파 산정 천동 벽촌 백동 구만동 송내 용교 구암 이목동 통산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2014년 현재 통산은 이목동1길로, 이목동은 이목동2길로 되어 통산과 이목동을 합하여 "이목동"이라합니다.

과거 모산이 나주였기에 타지인들은 지금도 나주 모산이라고 해야 하는 것처럼(영암 모산이라하면 잘 모름) 이목동도 모산 이목동이라 해야 유림에서 알기에 지금도 모산에 속한 이목동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梨木洞(배나무이, 나무목, 마을동)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으로 1598년 끝난 7년의 전쟁으로 국민 경제를 퇴락되어 1600년대 모산에 거주하던 18세 용공(茅崗公, 이하 선조 경칭 생략함)의 5남 몽삼(남제공) 후손 일부가 모산에 경작할 농토가 부족하여 배나무(당시는 돌배나무)가 있는 골자기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산에 살아갈 농토가 부족하여 모산에 거주하는 문화류씨들이 모산을 떠나 옆마을을 개척하여 살게되어 12동네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목동에 현재는 문화류씨가 약 20여호 거주하는데 “이목동 류씨”는 틀린 표현입니다. 몽삼 후손중에 모산에 거주하는 분이 이목동 거주하신 분보다 배 이상 많기 때문입니다.

1680년대 약재공(대승공 22세)이 3종조카 경창(대승공 23세)과 바둑을 두고 사람됨을 교육 시키려 이목동에 자주 들렸다는 기록이 족보에 있습니다.

몽삼과 아들 약과 척은 한양에서 살았으며 몽삼의 손자 인남(대승공 21세)이 모산에 와서 살았고 인남의 아들 격(대승공 22세, 장사랑)부터 이목동에 터를 잡았으며(족보상 묘지 위치로 보아) 그 후손이 모산과 이목동으로 분산하여 살았습니다.

1960년대 보리 고개 어려운 시절에 모산리 이목동 후손들이 자금을 모아 고양시 일산의 남제공 묘소와 시제 관리를 위해 1970년 논 3,318㎡를 일산 사리현에 마련하고 그후 정읍 다내 후손들이 보태어 서울 남제공 종중에서는 남제공과 아들 약의 부동산이 임야 47,603㎡ 포함하여 13필지 57,730㎡(17,462평)의 재산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영암 신북 모산의 남제공 종중(태리동종중 : 종회장 류신일)은 1960년대 후손들이 모산과 이목동 태리동 부근에 전답을 마련하도록 주도적 역할을 하신 寅亨(1885-1976) 戊烈(1918-1978, 인형 당질)님을 중심으로 당시 재산 증식 수단인 벼의 원리금을 지게로 가마니에 운반하여 爲先 노력하신 어려 어르신 덕분으로 位土畓을 마련하여 더 많은 위토전답으로 되었으며, 인남 격 경창의 상속되어온 위토전답과 임야와 후손이 좀도리로 모아 마련한 땅이 50필지에 646,835㎡(약 19만 6천평) 과 그 수입으로 1978년까지 선전관 인남 이후 모든 선조의 墓碑를 마련하여 태리동 종중으로 비약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출처 : 문화유마을
글쓴이 : 夏谷 류재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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