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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공 묘에 부인 이씨가 없는 이유

ryu하곡 2012. 8. 21. 12:23

 

하정공 묘에 부인 이씨가 없는 이유

  류관의 아버지 안택은 1361년 지금의 죽산(안산 부근) 동촌 서산 기슭에 안장하였으며 1427년에 황해도 구월산 대승공 묘의 서쪽으로 200보(약130m)에 이장합니다.

  하정공 부인 광릉부원군 안씨는 양근군 남중면 왕충리 유좌(酉坐) 언덕에 안장합니다.(지금의 양평군 강하면 일대)

  하정공은 양근군 남중면 왕충리 신좌(辛坐) 언덕에 안장합니다.

  하정공부인 풍주군이씨는 구월산 동록 판교동(九月山 東麓 板橋洞) 을좌(乙坐) 언덕에 안장합니다(묘갈명)

 

  지금은 가족묘를 많아 조성하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옛날에는 부모 부부간이라도 먼저 돌아가신 묘 옆에 장사 지내는 일은 없으며 부부간의 경우 약 3년후부터 뼈만 남았을 무렵부터 좋은 날을 택하여 합장하였습니다.

하정공 아버지 안택은 홍건적난 때 피난처에서 돌아가셨기에 죽산에 모셨다가 구월산으로 이장하였으며, 하정공 안씨부인은 양근근 유좌에 안장하고 하정공은 양근군 신좌에 안장합니다.

  하정공 묘소를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의 남향(南向)언덕에 이장하면서 안씨 부인을 부좌(祔左)에 모셨고 1981년 경기도 기념물 62호로 지정되어 보호와 관리를 받고 있다.

  남북이 왕래를 할 수 없기에 하정공부인 이씨를 구월산에서 양평군으로 이장하지 못하고 있다. 하정공 후손으로 이씨부인이 후배라고 해서 합장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족보를 보면 광릉군부인안씨, 풍주군부인이씨로 되어 있으며 풍주군부인이씨의 묘갈문비가 있다.

  세 아들을 참판, 호군, 판서로 길러낸 광주군부인안씨(廣州郡夫人安氏)나 전처의 세아들과 자신의 소생을 만호로 그리고 종의 집에서 살고 있는 조카 사눌을 대제학, 중추원동지사로 훈육하였으며 당시 다른 정승은 노비가 100여명이였으며 또다른 정승은 넓은 기와 집에서 살았다는데, 하정공은 등청할 때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서 다녔기에 노비로 동자 한명과 늙은 여종 2-3명이였으며, 녹봉으로는 귀천을 가라지 않고 글을 가르치고, 이웃을 돕으는데 사용하여,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풍주군부인이씨(豊州郡夫人李氏) 모두 정경부인으로 족보와 호구에 올라있는 분이다.

 

  족보의 이씨부인 묘갈문과 하정공의 상소문(두 부인 사이에 난 자식들 문제 판결 기준을 정한 상소문 “請懲有妻娶妻疏”에서 처럼 하정공의 두 부인을 차별한 흔적을 볼 수 없다. 안씨부인 소생을 가르치고 길러 분가시켰는데 자식들이 차별하여 하정공 묘소에 이씨부인이 없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