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기 독후록 13. 원파록은 족보조작을 위해 필요했다.
출처 : 문화류씨대종회(http://moonhwaryu.kr/ )/종사토론에 글을 소개합니다.
작성자 류재준
작성일 2012/05/07 10:00:09
글제목 설원기 독후록 13. 원파록은 족보조작을 위해 필요했다.
글번호:90/90
설원기 독후록 13. 원파록은 족보조작을 위해 필요했다.
차식 3부자는 한미한 차씨 가문을 넓히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교묘하고 치밀한 원파록을 조작합니다.
① BC 2704년(2704년+2012년=4716년 전) 중국 황제를 시조로 희씨 사씨로 출발합니다. 모화사상 사대사상의 극치입니다. 조선으로 넘어와 ③ 王씨가 만들어 지고 ④ 田씨가 되었다가 ⑤ 申씨가 되더니 ⑥ 車씨가 만들어지고 숨었던 楊씨가 나옵니다. ⑦ 柳씨를 사성하여 조선 원파의 성씨가 만들어졌다 합니다. 중국황제의 성 姬씨 姒씨와 조선의 성 王씨 車씨 柳씨 5성이 원파가 형성되어 4700여년의 원파록을 갖게 되었다고 조작합니다.
4,700여 년 전 저들의 염색체와 유전자와 DNA는 동일하고 상호 연관성을 갖는지----- 허허허 그것 참- 차천로는 이렇게 세상이 변하고 발달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겠죠---
그런데 현재의 차씨들은 이것이 맞답니다. 5성(희씨 사씨 왕씨 차씨 류씨)는 한 할아버지 아래 다섯 성인 동조이성이 맞다고 설원기는 틀림없답니다. 역사와 과학이 재 증명하겠죠---
1. 조선 시대 족보 발간 실태를 탐구하여 보고 원파록과 연계하여 분석하고자 합니다.
다음 글은 2001년6월14일 대전 뿌리공원에 세워진 연안차씨 유래비 문안 중 문화류씨를 폄하하는 부분만 옮겼습니다. (원파록의 중심부 분입니다.)
차승색(車承穡)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덕왕 (憲德王)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가성류씨(假姓柳氏)로 모칭(冒稱)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하고 아들은 숙(淑)으로 개명(改名)하고 살았다.
둘째아들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 구성인 왕씨로 복성 하였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부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러한 인연으로 차씨는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고려조의 차씨는 왕씨와 똑 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가성(假姓) 류씨(柳氏) 6세인 류해 (柳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 하였으므로 공을 삼한통합 벽상 2등공신에 봉(封)하고 본성이 차씨이기에 조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차달(車達)이라는 호를 내리고 가성류씨(假姓柳氏) 6세는 본성 차씨로 복성 을 하였다. 큰아들 차효전(車孝全)은 통일에 필요한 군량미를 헌납하였기에 개국 수공자로 대광지백(大匡之伯)의 벼슬이 제수 되었으며 연안군 (延 安君)으로 칭하였다.
연안에 식읍 천호도 받으시고 차씨의 옛 홍렬(弘烈)을 승습(承襲)케 하고 종적을 연안(延安)으로 하니 연안 차씨 득관조(得貫祖) 1세가 되었고 둘째아들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로 명사(命賜)하여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씨와 류씨로 각각 분성 되었다. 차문은 신 라, 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이 대를 이어 배출된 명문의 집 안이다.
동화요 전설이요 설화입니다. 대승공 류차달의 업적을 차승색에게 갖다 붙입니다. 문화류씨를 교묘하게 끌어들여 가성류씨 가짜성 류씨라 하며 끌어드리는 조작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차천로의 문장조작력의 극치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에 속아 내려왔습니다.
큰아들 차효전은 연안차씨 시조 둘째아들 효금은 문화류씨 시조가 되니 대승공 류차달 선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합니다. 원파록의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차천로의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비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장식하고 있습니다.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유달리 많은 종문 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승(繼承)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 차씨유래(종보) 1999.5.1유래비 |
이 비문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그들에게 발송되었다 하니 어디에 어떻게 이용되고 사용되며 어떤 문헌적 가치가 있다는 겁니까? 모화사상이 아니라 세계인을 상대한 극단의 사대주의, 아첨주의가 아니겠습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차천로가 차원부 설원기를 위서한 원파록의 근본 목적이 위 비문에 극적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설화 문학의 한 구절도 아니요 동화의 나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연안차씨 가문이 문화류씨 가문을 이렇게 폄하하고 깔아뭉개는 언어를 온 천하 사람에게 공개하는 저들의 심성이 그리고 인성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비문은 그 자리에 만인 앞에 버젓이 서있습니다. 차씨는 대한민국 국민이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차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시조를 중국 황제에게 두고 희씨 사씨 왕씨 차씨 류씨 5성의 황당무계한 원파록을 조작하여 왕차류 족보를 원파로 이어지게 하려는 파렴치한 술수가 있는 것입니다.
차씨 3부자, 차천로가 원파록이라는 괴상한 문건을 조작하는 조선 중엽의 족보발간 실상을 탐구하여 보고자 합니다.
2. 원파록이 발간되던 시대상을 알아 보았습니다.
원파록이 차식 3부자 차천로 주도로 위조 위작 위서 되는 당시의 시대 흐름을 알아봅니다.
① 1320~1398년 : 설원기의 주인공 차원부 졸한 연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② 1392년 :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의 건국은 역성혁명으로 시대가 혼란스럽습니다.
③ 1355~1408년 : 태조는 등극하여 차원부에게 여러 가지 정치적 조언을 받으며 조선조에 관리로 등용하려 하나 고려에 대한 절의로 거절하였다고 절의 충신으로 한껏 높입니다.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 하륜에 의해 서얼이라 낙인찍힙니다. 차원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차류족보는 신광사에서 불태워지고 마원에서 70여인과 함께 추살 당하였다고 합니다. 설원이 되었고 간의대부 시호가 내렸다고 온갖 조작된 것이 설원기의 주제입니다. 차원부에 관한 기록은 검증이 되지 않습니다.
④ 1423년 문화류씨 영락보가 세계최초로 발간되었으나 서문만 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차식 3부자에게는 큰 자극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⑤ 박팽년은 세조의 명에 의하여 1456년 설원기를 지어 바쳤다고 위조합니다. 사육신이 역적으로 처형됩니다.
⑥ 1441~1457년 단종은 세조의 쿠테타에 의하여 짧은 생애를 마칩니다. 설원기 찬을 명 한 왕이 단종, 세조로 오락가락합니다.
⑦ 1476년 안동권씨 성화보가 발간됩니다.
⑧ 차식 1517~1575년, 차운로 1559~1637년, 차천로 1556~1615년
⑨ 문화류씨 가정보가 1565년에 발간됩니다.
⑩ 1580년 설원기가 차천로가 주도로 간행됩니다. (차천로 24세)
⑪ 1526~1586년 설원기 필사본이 시중에 등장합니다.
⑫ 1592~1598년 임진왜란입니다. 족보의 위작 판매 등이 심합니다.
⑬ 문화류씨 기사보가 1689년에 발간됩니다. 차씨들의 집요한 감언이설로 원파록이 등재됩니다. 류*차 동조이성의 차천로 목표가 달성됩니다.
⑭ 1708년 연안차씨 무자보 족보가 발간됩니다.
⑮ 1798년 개성왕씨 족보가 발간됩니다.
⑯ 연안차씨강남보 1812년 발행 되었으나 강남공파에서는 원파록이 위조라고 싣지 않습니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성리학 사상이 만연합니다. 문벌의 세력이 확장됩니다. 사노공상의 사회 질서가 형성됩니다. 모화사상과 사대주의가 사회를 풍미합니다. 임진왜란은 바깥 나라의 사정에 관심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관청에 드나들었던 차식 3부자는 원파록의 자료를 얻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차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차천로의 비상한 문장력과 그들의 품성과 인성은 차원부설원기를 위서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3. 위서 원파록은 어떻게 창조 조작 되었을까?
① 차식 3부자는 관청을 출입하면서 가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현창할 방법을 찾습니다.
② 주인공으로 차씨 문중 한 인물 차원부를 선정합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온통 조작으로 되어 실제 인물인 지를 의문케합니다.
가문과 사회에 훌륭한 인물이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한을 품고 죽었으니 이를 설원하는 과정으로 설화, 전설 같은 이야기로 뼈대를 만듭니다. [차원부설원기]라 제목을 붙입니다.
③ 이를 뒷받침할 응제시를 꾸밉니다. 차천로는 공인하는 시인 이였습니다.
④ 선계를 5,000여년 전 중국 최초의 황제 헌원을 조상으로 설정하고 희씨 사씨 계선을 조작하고 당시 몰락하는 개성왕씨의 왕자를 빌어 차씨를 만들고 당시 명문으로 회자되는 문화류씨 류차달의 차자와 차씨 성을 교묘하게 조작합니다. 중국의 황제 성인 희씨 사씨에 조선 성인 왕씨 차씨 류씨를 교묘하게 위작하여 5성으로 동조이성이 되는 원파록 줄거리를 만듭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놀랍습니다.
⑤ 차천로는 외국을 출입하면서 중국의 역사와 족보자료를 구합니다.
⑥ 1580년 발간이후 필사본으로 유통되면서 원본에 첨삭 가감이 이루어집니다.
4. 원파록 원본
1955년에 발간된 전남광산군 본량면 동호리 대동사원지(大東祠院誌)에 실린 원파록 주요 부분입니다.
35쪽 분량의 본문을 영인하여 올리기가 여의치 않아 장절의 문장만 실었습니다.
서문은 幸州 奇世哲이 지었습니다.
① 희씨세계제일편(姬氏世系第一編) 1세 皇帝 2세 少昊~~~5세 夏后씨 까지 기록됨
중국 : 황제 소호 단경 제고 당 제효 오 제순
조선 : 단군
② 희씨상계자황제지숭백범사세이전우사씨 (姬氏上系自黃帝至崇伯凡四世而傳于姒氏)
③ 사씨세계제이편 (姒氏世系第2編) 1세 夏后禹~~~11세 向까지 기록됨
중국 : 하 우하
조선 : 단군
④ 사씨자하우지불강범십세이전우왕씨 왕씨세계제삼편(姒氏自夏禹至不降凡十世而傳于王氏 王氏世系三編)
⑤ 1세 王祖明 2세 仙牛 3세 北頭~~~~59세 浩까지 기록됨
중국 : 공갑 자 발 계 상 성탕 대갑 옥정 태경 옹기 대술 중정 외임 단신 조을 조신 옥갑 조정~~
조선 : 단군 조선 삼한 마한 경왕 혜왕 명왕 효왕 쇄왕 원왕
⑥ 왕씨상계자조명지엄범오십칠세이전우차씨 (王氏上系自祖明至嚴凡五十九世而傳于車氏)
⑦ 차씨세계제4편 (車氏世系第四編) 1세 車無一 2世 神乙 3세 夫道~~~ 33세 承穡 34세 恭叔까지 기록됨
중국 : 동한 촉한 서진 동진 제 양 진 수 당
조선 : 신라 보성왕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 법흥왕 진지왕 경덕왕
⑧ 차씨상계자무일지건신범32세이전우류씨 (車氏上系自無一至建申凡32世而傳于柳氏) (柳氏世系第5編)
⑨ 1세 柳穡 2세叔 3세 振阜 4세 茂先 5세 普林 6세 車達 까지 기록
* 차승색이 고려태조 명에 의하여 본성명을 1세 류색~6세 차달까지 계보를 조작했는데 여기서부터 대승공 류차달이 사라집니다. 교묘한 비열한 조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⑩ 1세 柳車達 2세 큰아들 車孝全 둘째아들 柳孝金 까지 기록
* 류차달 큰아들 차효전은 차씨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효금은 문화류씨 시조가 됩니다.
* 도대체 이렇게 류 차 상계를 조작하는 수법이 발상이 놀랍습니다.
⑪ 류씨사성전상계자색지보림5세이전우차달 (柳氏賜姓前上系自穡至普林5世而傳于車達)
* 류씨는 사성 전 색에서 보림까지 5세를 전하여 차달에 이르렀답니다.
⑫ 원파5성상계범108세역년황제원년정사지후량균왕정명4년무인(신라경명왕원년)합3612년
⑬ (源派5姓相系凡108世歷年黃帝元年丁巳至後梁均王貞明4年武人(新羅景明王元年)合3612年)
* 원파5성은 황제 원년부터 신라경명왕 원년까지 3612년이 흘렀다고 기록합니다.
* 황제 자손 姬씨 姒씨 王씨 車씨 柳씨 5姓이 한 원파를 이루었다고 기묘하게 조작합니다.
*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야 전후좌우가 분별될 것입니다.
이어서 차씨 상계와 류씨 상계를 분류하여 놓았습니다.
⑭ 차씨각파상계
⑮ 1세 柳車達 2세 車孝全 3세 秀毗~~~~~ 21세 密頫까지 기록됨
⑯ 류씨각파상계
⑰ 1세 柳 穡(차승색 류씨로 복성 조작) 2세 柳 叔 3 세 振阜 4세 茂先 5세 普林 6세 車達 까지 기록됨
⑱ 1세 柳車達 2세 孝金 3 세 金奐~~~~~ 14세 南浦까지 기록됨
5. 당시의 족보 유통 상황은 어떠 하였을까?
차천로는 교묘하게 중국황제 자손과 5성이 동조 이성이란 허무맹랑한 조작이 벌어지는 당시 조선시대 상황과 류*차 문제를 인터넷에서 참고를 찾던 중 다음 글을 찾아 여기 올립니다. 어느 성씨 집안(00김씨) 족보의 위작 위조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기 위한 00 0씨 종친 어느 분이 이수건 교수의 논문에서 필요한 부분을 요약하여 학자의 견해를 올렸습니다.
마침 류*차 문제와 성격이 같음이 발견됩니다. 또한 이수건교수의 지적 중에 [차원부설원기]가 위서임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작금의 류*차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시사점을 많이 얻게 됩니다.
① “한국족보의 진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일부 족보들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한 성씨조를 제쳐놓고 처음부터 잘못된 성관 지식과 조작된 자료들을 갖고 성과 본 조상의 세계와 파를 기록함으로서
- 한국 성관 유래를 중국의 경우와 동일시 한 점
- 한국성관의 주체가 토성인데도 그 시조가 중국으로부터 왔다는 동래설을 강조하는 점
- 특수한 몇몇 예외적인 것을 제외하면 동성도 타성과 같다.
- 신라의 朴 昔 金 3성과 이 최 정 손 배 설 등 6성 및 기타 왕실 귀족성을 제외하면 나머지 성관은 모두 고려 초기에 나왔다.
- 중국처럼 봉후건국(封侯建國) 한데서 賜姓 受氏 한 것이 아니면 고려 초기 토성을 분정 받은 뒤에 공신 외척 고관 등으로 인해 본관별로 봉작읍호(封爵邑號)를 받은 것이며 어떤 고을에 봉군됨으로써 본관을 받 게 된 것이 아니다.
- 고려초기 이래 려말 선초까지 지방의 신흥 세력들은 그 주류가 향리 가계에서 출자 하였는데도 조선초기 족보에서는 그 선조가 향리였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향리관련 자료를 삭제함으로서 조상 세계 와 직업이 잘못 기재되었다.
- 려말 이래 문벌을 숭상하는 풍조가 고조되자 왕실 외척 부마 및 태조 공신 등과 같은 국내 고귀한 기성 벌족과 연결시키기 어려운 성관들은 그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구하는 풍조가 조선 초기에 만연하고 후 기로 올수록 더욱 심해졌다.
- 그 성관이 세종실록지리지 소재 군현토성으로 나타나는 한 그러한 시조 동래설을 후대에 와서 조작 윤색 된 것으로 설득력이 없다.
- 조선시대 편찬된 족보가운데 고려 개국공신 내지 삼한 공신은 시조로 내세운 조상의 세계에 있어서 실제 가문을 일으킨 기가조(起家祖)와 시조 사이에 조상들은 세대수와 연대 및 조상의 직열이 맞지 않는 경우 가 많다. 이는 기가조 이래 여말 선초에 와서 가계기록 또는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고려 초기 공신 을 시조로 네세워 3~4백년간의 공백 상태를 적당히 보충 연결하는 데서 대수와 직업이 맞지 않는다.
- 고려 후기 문집이나 ‘동문선’ 소 기(記) 서 발문 중에는 족보관련 서 발문은 전혀 쓰지 않음을 보아 15세 기 전반까지는 판각편책(板刻編冊)하여 간반(刊頒)된 명실 상부한 족보는 나오지 않았다.
- 고려시대는 고승들의 비문만 있었고 관료들은 묘지만 남겼고 15세기 이후처럼 신도비와 묘갈명은 하지 않은 것 같다.
- 조선초기 또는 중기에 중간 정리 단계를 거친 조선 전기 족보는 대체 사실이 충실한 반면 18,19세기 이 후 창간된 족보는 당대인들의 소록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그 성관의 유래와 선대 세계에 관한 서술은 크게 사실과 어긋나 있다.
② 한국족보 진위에 대한 이해
- 1152년(의종6)에 작성된 김의원(金義元) 묘지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볼 수 없었다’고 한바와 같이 고려초기에는 사가(私家)의 가계 기록인 보첩 같은 것은 있었다.
- 한국최초의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에 서거정은 그 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예부터 종법도 없었고 또한 보첩도 없었다. 비록 거가대족이라도 가승이 전무하여 수대만 겨우 전해저도 高曾祖考의 명휘를 기록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하여 족보편찬이 중국보다 훨씬 뒤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 그러므로 17세기 중엽이전에 발간했거나 초고 또는 초안해 놓았던 가문들은 조상세계와 족계에 대한 일 단 중간적인 정리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후기에 내용이 충실한 족보를 발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래 최근까지 300년 간 문호를 차린 가계에서는 가통이 게승 될 수 있었으나 17세기 이전은 아무리 명 문 벌족이라도 무자(無子)한 세대의 단절이 많았다. 그런데 현존 족보상에 고려 또는 조선시대 10대 내지 15대가 줄 곧 연접되어 있는 것은 유아 사망률이 높고 양자를 하지 않던 18세기 이전에는 무자(無子)로 인한 가계단절이 많았다.
- 17세기 말 이래 현조를 확보하지 못한 신흥세력들은 기존의 명문거족과 연결을 시키기 위해 개관(開貫) 거나 투탁(投託)하기도 하며 동성이라도 파(派)계에 따라 현조가 없는 계열은 현조가 있는 계열과 세대를 적당히 연접하여 합보하는 예가 많았다. 또한 신흥 세력들은 가첩 가보 호구 분재기 입양문서 등을 위조
- 하거나 가짜 비석을 발굴하거나 명문족보의 선대 무후계와 연결하거나 형제수를 늘리거나 끼우거나 한 대 수를 삽입해서 연결하는 등 협잡을 자행하였다.
- 그리고 한미한 가계나 신흥 세력들은 자기 조상을 여말의 수절인사와 단종의 충신과 결부 시켜 조상세 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조상 세계의 조작과 위보가 속출하게 되었고 또한 비양반이 일정한 부를 갖고 궁벽한 기성 사족을 찾아서 족보 편찬 경비를 부담함으로써 합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차원부설원기]가 위조 위작 위서된 것을 우회적으로 표하고 있습니다.
③ 18세기 이후 족보의 특징
- 시조 또는 선조가 신라 내지 고려왕실 부마 공신이나 또는 고관 요직을 역임 했거나 명문 출신이고 또 가문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데서 선대와의 세계를 지나치게 소급되었다.
- 족보상에 기재된 선조들은 관직도 지나치게 과장 되었다.
- 고려 사족들은 대개 모화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찾았다는 데서 현존 족보상에는 시조가 중 국출신이 많다. 이는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파록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 신흥세력들은 미천한 조상 세계를 은폐하고 혈통과 가격(家格)을 보증하기 위하여 개관하거나 조상의 세 계를 적당히 조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시대 양반사회가 발달하여 향리의 지위가 격하되고 천시를 받자 선대의 신분을 은폐하기 위해 본관을 바꾸거나 사족(士族)이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불복신벌정(不服臣罰定) 사족강리(士族降吏)의 구 실을 내세워 족보와 가승 등에 기술하고 있으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 일제 때 편간된 족보는 그 견본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각 성관의 특성 유래나 조상 세계 관직 등은 사실의 고증 없이 조작되었다.
- 8,15이후 최초에 간행된 족보들은 현재 대전시의 회상사(回想社) 족보도서관을 비롯하여 각 시도의 공공 도서관 족보실에 소장 되었는데 그 내용은 일제 때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 조선 후기에서 일제 시대에 창간한 족보는 충분한 고증을 하지 않거나 원형이 변질 된 것과 조상세계가 조작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에 있어서 실증적인 방법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의문점은 후세에 전해도 좋지만 거짓 이나 명백한 잘못은 전해서는 안 된다 했듯이 (疑固可傳訛不同可傳也 眞信書不如無書 孟子) 진위와 허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문헌은 자료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한 문헌 자료를 설화문학 또는 위서로 간주한 것을 연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역사적 자료로 인용하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국의 성씨와 족보’ 저자 이수건 2003,6,10 서울대학교 출판부
6. “문화류씨 족보” (인터넷에서 다음 글을 찾아 여기 올립니다.)
블로그 물고기와 물병 2008.9.20. 류주환교수의 글
이수건 교수의 저서 "한국의 성씨와 족보"는 2003년에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책입니다.
이 책은 다루는 주제가 약간 달라서 "차원부설원기"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진 않지만 몇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해당 부분들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 족보에는 거짓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제 올바른 관점을 정립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신분사 관련 자료에 대한 분석 비판에서 또한 위작된 자료와 위서에 관한 관심을 가진 데서 그 분야에 대한 논문도 발표한 바 있다. 18세기 이래 쏟아져 나온 각 성 족보를 비롯하여 "차원부설원기"(차문절공유사). "華海師全" "話東人物叢記" "經學隊杖" "杜門洞實記" "火旺入城同苦錄"과 "桓檀古記" "揆園史話" "金澍傳記" 및 최근 공개된 "花郞世紀" 등을 열람하면서 당혹감을 금할 수 없다. 진위와 허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문헌자료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러한 문헌자료를 '설화문학' 또는 위서로 간주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역사적 자료로 이용한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다.
사림파 세력의 성장 추세에 비례하여 의리와 명분문제가 더욱 숭상되자 한미한 가계나 신흥세력들은 자기 조상을 여말의 수절인사와 단종충신과 결부시켜 조상세계를 정리하려는 데서 차씨 인사에 의해 "차원부설원기"가 편찬되고 서산김씨와 경주김씨 인사에 의해 고려 말 金澍와 金自粹의 충절 사실이 조작되었는가 하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의리 명분과 존주사상 이 고조되고 숙종조 단종복위와 사육신 등의 신원, 영조의 개성행차 때 不朝峴 立碑와 杜門洞 72현 추숭과 같은 국가적인 포충 장절책에 편승한 신흥세력의 조상세계 조작과 함께 위보[거짓족보]가 속출하게 되었다.
모든 성관이 명조 현조를 확보해야 한다는 집념 아래 조상세계를 조작 소급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갔다. 그 결과 18세기 이래 朴氏는 혁거세, 김씨는 閼智와 敬順王 또는 首露王, 李 . 崔 . 孫 . 鄭씨 등은 신라 6성에서, 趙 . 姜 . 洪 . 林 . 黃 . 南 . 楊 . 盧씨 등은 중국의 유명성에서 각각 소급 연접시켰다. 韓氏와 奇씨 鮮于씨는 馬韓 내지 箕子까지 민족의 시조인 단군까지 소급 계보화 하려는 데서 조상 세계가 지나치게 소급된 것이나 조상세계가 날조, 가탁된 위보[거짓족보]들과 함께 "차원부설원기"(그것을 보완한 "차문절공유사")와 같은 위서들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관 모관 조상세계 조작과 투탁 행위는 17세기 이래 신흥세력이나 '양반이 되고자 하는 자'(欲爲 兩班者)들에 의해 자행되었고 그 결과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편간된 보첩류에 연접 등재됨으로써 후대 족보상으로는 모두 명조 현조를 확보하여 양반으로 성장 해갔던 것이다.
7. “조선시대 족보” ( 인터넷에서 찾아 원파록을 분석하기 위한 자료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씨족 세계도 가첩 또는 족도(族圖)등 고문서 형태의 족보들이 있었다. 그러나 족보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원래 족보는 고급 관리의 내외 자손들이 문음(門蔭)의 승계 또는 과거와 벼슬살이를 위해 자신의 가계와 신분을 증빙하는 근거로 이를 작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점차 보편화 되면서 족보다운 족보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체계적인 족보는 왕실 에서 먼저 편찬하였는데, 태종 임금 때 선원록(璿源錄)· 종친록 세종 임금 때의 당대 선원록 등이 그 것이다. 민간에서는 성종 7년(1476년) 안동권씨성화보(1476년)가 인쇄 반포된 이후 17세기를 거치면서 족보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① ☞족보 기록내용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는데, 양반들은 족보를 통해 혈연적인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하층민과 차별성을 과시하였다. 조선시대에 양반은 사회적인 여러 특권을 누렸고 상민 상민과 천민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 되었다. 따라서 이들 상민과 천민들은 누구나 양반이 되고자 하였으며, 이들이 양반이 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족보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의해 족보는 조선 후기에 더욱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나갔다. 족보에는 시조에서부터 세대 순으로 이름과 자 호 시 과거와 관직 저술과 문집 및 묘지 위치 등 개인의 모든 경력과 이력이 기재된다. 또한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 양자를 들인 것인지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족보는 철저히 남자 중심의 기록물로서 조선시대의 여자들은 대개 이름이 없었기에 여자의 이름이 족보에 오를 수 없었으며, 딸은 사위의 이름으로 올려지게 되었다. 부인의 경우에는 친정의 본관과 부친 및 가문의 이름난 조상이 기록될 뿐이다. 또한 족보는 30∼40년 또는 50∼60년마다 또는 100여년 뒤에 반복해서 새로이 편찬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동일 성씨의 족보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② ☞족보는 양반 조선시대 족보는 그 자체가 양반임을 의미하였고, 양반의 소유물이었다. 양반의 신분적 특권은 고귀한 혈통과 뛰어난 조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일부 양반 가문에서는 왕실이나 이름난 귀족들을 시조로 두기 위해, 혹은 이들의 계보에 자신들을 접속시키기 위해 족보를 편찬하면서 본관을 바꾸거나, 조상 의 계보를 조작·윤색 하는 사례가 성행하기도 하였다. 성종 때 문신인 서거정이 달성서씨 성화보 서문에서 밝혔듯이, “조선에는 원래 족보가 없어서 거가대족 이라도 몇 세대가 지나면 조상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실제 성화보에는 시조에서 부터 12세까지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달성서씨 명문가에서도 이러하였으니, 이들 보다 뒤늦은 가문의 경우에는 조상의 계보가 불명확 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18세기 이후에 비로써 족보를 편찬할 수 있었던 가문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편찬된 족보에서는 세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경우는 시조와 상대의 기록이 허위이거나, 적어도 과장 왜곡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성씨와 본관을 바꾸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③ ☞본관을 바꿈 성씨의 사용은 삼국시대 이전부터인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6·7세기 경부터 라고 할 수 있으며,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이 각지의 호족들에게 그 지역을 근거로 하는 성씨를 나누어줌으로써 성과 본관을 토대로 한 성씨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조선 초기에 들어와서 지방의 군현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편됨에 따라 지역을 세분하여 다양하게 존재하던 본관이 15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주읍(수령이 파견된 군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즉 속현 촌 및 향소 부곡 등이 소속 군현에 통합되거나 소멸됨으로서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 성에 흡수되거나, 그 주읍을 그들의 새 본관으로 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관을 서로 달리하던 동일 성씨가 같은 본관을 쓰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으며, 이들 동성 상호간에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점차 동성동본으로 취급되었다. 본관이 바뀌는 것은 행정구역의 개편 때문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문벌 의식이 고조되면서 저명한 조상이 없는 가문에서는 기존의 명문거족에 동화하기 위해 본관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기도 하였다.
④ ☞가짜 족보 조선시대 신분제사회에서 양반이 아니면 상놈이고, 상놈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상민들이 군역을 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이 되는 사례를 지적하였다.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현족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에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상민과 천민들은 그들의 시조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며, 족보를 만들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도, 동족의 혈연적인 기반도 갖추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들이 족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양반이 되기 위함이지 그들의 진정한 뿌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이들에게 필요 하는 족보란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양반의 족보일 수 밖에 없었다. 가짜 족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상민과 천민들만이 아니었으며, 더 훌륭한 가문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싶었던 양반의 경우에도 더 높은 문벌가문이 되기 위하여 가짜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성과 족보를 갖고 있는데,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양반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원래 우리 모두는 성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우리 모두 양반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우리 모두가 조상들에 의해서 양반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글을 맺으며
* 조작 위작의 극치입니다. 이러한 엉터리 5성 성씨의 역사와 차씨는 형님집 류씨는 아우집이라는 원파록이 문화류씨 가정보(1689년)에 등재된 이래 2008년까지 319년 간 내려온 가문시를 반성합니다. * 원파록을 분석함으로써 차식 3부자와 주도자 차천로의 조직력 조작력의 우수성을 확인합니다. 1580년 위서로 세상에 나온 이래 차문의 끈질긴 생명력 연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 온 천하에 위서로 판명이 난 이상 차문에서는 혼란스러움이 예상되고 위서(僞書)를 진서(眞書)로 탈바꿈시키는 논리개발 작업이 지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 류주환 교수께서 [차원부설원기]를 위서로 비판, 비평, 논증한 대호하루(大虎下淚)(대종회홈페이지 자유게시판 103번) 비평서가 문화류씨 모두에게 그리고 대한민국 식자들에게 일독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 인터넷 상에 원파록을 근간으로 한 문화류씨에 관한 기술(記述)에 댓글 덧글로 바로 잡아주시는 것도 문화류씨의 책무이기도 할 것입니다.
* 문화류씨 여러분께 펑화와 강녕과 안녕을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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