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대종회홈(http://moonhwaryu.kr/)/종사토론의 글
작성일 2011/02/26 20:29:33
글제목 차문종보 제17호 독후감
고맙게도 차문(車門)의 임원 한 분께서 2월 24일 발표된 제17호 차문종보의 파일을 필자에게 보내주셔서 읽어 보았다.
그 차문종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류차관계였다. 이것은 특집으로 다루어져 있고, 그 안에는 "차.류 문중은 동선이성(同先異姓)", "車.柳 종원에게 호소합니다", "호랑이 설화를 통해 본 차.류 양문의 동원설"이라는 세 개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류차관계의 글로 "<차원부 설원기>란 어떤 책인가?"라는 글이 하나 더 있다. 위 제목들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차문종보에는 류씨와 차씨가 같은 선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주장과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가 위서(僞書)가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이들 4개의 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하 '필자'는 본인(柳)을 지칭한다.) [주: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대개 아직 차문종보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볼 기회가 적을지도 모르겠다. 논의를 위해 아쉬운 부분이지만, 저작권을 존중하여 필자가 차문종보를 공개할 수는 없다. 행간을 읽으면 충분히 논의의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1. "차.류 문중은 동선이성(同先異姓)" - 저자: 문헌위원회
이미 필자나 문화류씨대종회에서 수차례 종보("유주춘추")와 대동보(족보), 인터넷 등을 통하여 오류임을 밝힌 자료와 주장들을 그대로 싣고 있다. 말을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차씨와 류씨와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위 글에서는 고려 때 서희의 "야사", 정지상의 "서경유기"("서경야사" 잘못), 김방경의 "초당일기"에 선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나 이 주장은 설원기의 조작일 따름이며, 저런 책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다. 또한 그런 주장에서조차 이 책들에 들어있던 기록 자체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적이 없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원파록은 여러 차례 그 잘못이 파악되어 문화류씨 대동보(2008년 무자보)에서 공식적으로 폐기된 사료이다. 이 안에 토론되어 있는 류용수의 계보, 왕배조의 계보 등은 모두 믿을 수 없다.
- 설원기를 직.간접적으로 읽고 거기에 나온 몇 개의 항목들을 수록한 "대동운부군옥"(권문해 지음)은 설원기의 진위에 대한 증거자료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설원기가 위서이기에, 비록 "군옥"이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으로서의 의의가 크지만 설원기를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모두 오류임은 자명하다.
- 설원기는 현란하게 쓰여 있어, 일견 무척 권위 있고 믿을 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스스로 조작임을 드러내는 구멍이 많이 나타나서 너덜너덜하고 그 저작 의도가 추악한 문헌임을 알 수 있다. 설원기에 대해 이미 여러 편의 역사학계 및 보학계의 연구 논문들이 나와서 엄정한 평가가 내려진 상태이다. 그 논문들은 모두 설원기가 위서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 평가에 대해 학술적인 답변은 하지 못하고 왜 기존의 거짓 주장만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 이전에 잘못된 역사에 오도(誤導)되어서 류씨와 차씨가 조상을 같이 모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최근의 얘기는 접어두고 과거에 그랬었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진실을 가리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 남병철 공(公)이 지은 대승공 신도비명에마저 류차동원설이 들어 있음은 그 건립 시기가 1863년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모든 류씨들은 잘못된 역사를 진실로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400년은 과연 긴 세월이다. 그러나 그 앞에, 류차동원설을 전혀 증거하지 않는, 따라서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는, 700여년의 세월이 있다. 앞으로 대승공 신도비도 수정해야 한다. 역사의 진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다.
2. "車.柳 종원에게 호소합니다" - 저자: 차호철
위 글의 저자는 이미 2003년에 대전뿌리공원에 차문의 유래비가 건립될 때 '선조님의 성씨를 바꾸'는 것이 문제가 됨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일에 대하여 류문에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차문에서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인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앞으로 차문과 류문의 화합을 위해 유래비문의 변경, 해당 선조들의 류씨 성(姓) 복원 등의 몇 가지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역사 왜곡에도 불구하고 류차 양문(兩門)이 무조건 사이좋게, 게다가 혈연으로서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 억지이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역사적 진위 여부에 있기 때문이다. 과연 위 글은 여전히 류차동원설이 거짓이라는 류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위 글에서 몇 가지를 지적한다.
- '류문의 지방 모 대학 교수님'은 '충남대학교의 류주환 교수'라고 쓰면 족할 일이다. 그것도 싫으면 '모 대학의 류모 교수'라 해도 충분한 일이다. 전에 차기탁이란 분이 영남대학교 이수건 교수를 지방 대학 교수라 폄하하여 필자가 신랄하게 비난한 적이 있는데 꼭 그런 일의 반복이다. 차라리 '중앙 서울에 있는 대한민국 중심 대학인 서울대를 나오시고, 세계의 중앙에 있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지금은 남한의 중심인 대전의 충남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류주환 교수'라고 쓰시라. 이런 표현이 용납될 수 없는 망발인 것처럼 저 표현도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망발이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우주 중심에 있는 것이다. 서울도 서울지역이요, 대전도 대전지역이다.
- 위 글은 이수건 교수도 오류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씨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만 언급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들지 않았으니 뭐라 논박하기 어렵지만, 필자가 알기에도 이수건 교수가 잘못 되었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되신 이수건 교수는 평생을 우리 사회의 가문과 신분의 역사가 오류로 점철되어 있음을 파헤치는 역작을 수행해 온 학자였다. 필자가 아는, 이수건 교수에 의한 김씨 관련 문제제기에는 김주(金澍)와 김자수(金自粹)의 두 역사인물의 행적묘사에 대한 것이 있다. 필자에게도 이들 문제로 어떤 김씨께서 연락을 해온 적이 있다. 조상이라면 역적이었다 해도 훌륭한 조상이라고 부풀리는 인식이 팽배한 문중들이 아직도 허다한데, 어찌 이수건 교수에 대해 난타가 없었겠는가.
이수건 교수는 논문에서 문화류씨 시조이신 류차달도 이름을 가지고 그럴 듯하게 행적을 꾸며 견강부회한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도 하고 있다. 필자는 후손으로서 이 주장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고 그런 주장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평가한 적이 있지만, 그때에도 이 교수의 그런 주장이 나올 여지가 있음은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살펴본 김주와 김자수의 경우도 이 교수의 주장이 나올 여지가 충분히 있어 보였다. 이수건 교수가 학자의 양심을 버리고 단순히 거짓을 위해 말들을 만들어냈다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다.
- 위 글은 설원기에 대해 다시 옹호를 하고 있다. 설원기가 위서임은 이미 위에 언급했다.
- 위 글에서는 흥미롭게도, 설원기에서 차문이 "네 분(주: '4얼')의 모함에 의해 멸문되는 참사를 당했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과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차씨는 고려시대에 비로소 등장하고 활약상도 여럿 보이지만 고려 후기에 역사에서 그 자취가 사라지고 만다. 설원기의 조선초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 차식과 임진왜란 때 활약한 그의 아들 차천로와 그의 형제들 때이다. 차천로가 과거 급제를 통해 그 천재적 문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와 설원기의 등장 시기가 완전 부합한다.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조상 조작과 부풀리기가 18세기부터 성행한 것을 보면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설원기는 단연 그런 행위의 효시요 백미라고 볼 수 있는 문헌이다. 설원기의 이야기 구도는 차문의 적자(嫡子)인 차원부와 무려 70여명의 일족을 차문의 서자들인 4명, 소위 '4얼'이 몰살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은 한미한 가계를 조작해 내기 위한 거짓 설정일 따름이다. 다만 위 차호철씨의 글에서는 앞의 언급 이상으로는 진실을 탐구하지 않고 있다. 이것을 포함해서 설원기의 곳곳에서 보이는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들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 설원기는 서로 다른 점들이 있는 이본(異本)이 많아 혼란스런 문헌이다. 소위 왕명(王命)으로 지었다는 말을 도배하고 있는 문헌치고는 이상한 대목이다. 그러나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필자나 학자들이 겨우 그 이본들 사이의 몇 가지 상위점(相違點)을 가지고 설원기가 위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설원기 자체가 로정(露呈)하고 있는 다수의 오류와 외적인 증거들이 설원기가 위서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 위 글에서는 대승공(류차달)에 대해 기록이 고려국사에 없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고려사"에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지만 적극적으로 다루어진 것으로 볼 수는 없으며, "고려사"와 실록에서는 단지 개국시 공을 세웠다고만 나오며, '고려개국 벽상2등 공신'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앞에 대승공에 대한 이수건 교수의 지적의 여지 중 하나가 이 점이다. 한편 대승공의 독자(獨子)이신 류효금은 고려국사에 나오지 않는다. 그를 문화군이라 높여 부르지만 이것은 16세기쯤에 "씨족원류" 등에서 보이기 시작한, 후대에 붙여진 호칭일 따름이다. 현존하는 문화류씨 최고의 족보인 가정보(1565)에서도 '좌윤(左尹)'이라고만 나온다.
이런 상황을 가지고 위 글에서는 공가문헌에서 빠진 것이 많으니 공가문헌에만 매달리지 말고 평가를 하자고 주장한다. 과연 아무 사건이나 인물이 역사서에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런 주장은 사실 판단 기준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망각 혹은 무시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다분하다. 나아가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들이 역사서에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굵직한 것들인데도 어떤 역사서에도 자취가 없거나 심지어 역사서에서 기술하는 정황이나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 저자(車)는 전문학자들에게 연구 용역을 의뢰하여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결과를 고대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필자는 지금까지 설원기나 류차동원설을 옹호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보이면 가능한 수단이 있는 한 연락하여 의견을 나누어 오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옹호를 철회하지 않은 개인이나 단체를 본 적이 없다. 물론 차문(車門)과 몇몇 차씨들은 예외이다. 필자의 입장에 적극 찬동의 의사를 전해오신 차씨 분들도 계심을 밝힌다.
그리고 저자는 "가문의 교수님께서는 전문분야가 아니오니 인터넷에서 속히 삭제하시고 가문 내에서 해결하시기 부탁드린다"고 당부하고 있다. 이것도 필자에 대한 말씀이라 판단되는데, 같은 맥락의 연구 논문을 발표한 몇 명의 역사학자들이나 현재의 설원기와 차원부에 대한 묘사가 문제가 있음을 공문으로 확인한 관계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같은 요구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 위 글에서는 영의정을 지내신 류상운 선조께서 기사보(1689년)의 간행에 관여했는데, 그런 그가 설원기가 위서임을 모르고 그 내용을 넣었다고 말하는 것은 후손이 선조를 폄하 모독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기사보를 보면, 원파록이 이상하니 후손들이 연구하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살펴보니 타당한 점도 있다는 논의를 거쳐 실어놓고 있다. 물론 영의정을 지내신 분께서도 설원기에 속아 넘어가신 것이다. 당시 유학자(儒學者)들이 극히 몇몇의 예외적인 경우 말고는 모두 그랬음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 후로도 수 백 년 동안 여전히 그래왔던 것이다. 지금 와서 인터넷의 발달로 자료 열람과 검색이 용이해지고 많은 문헌들이 도서관에 잘 정리되어 있고 연구들도 집적되어서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류상운 선조께서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간단한 과학지식을 잘못 알고 계셨던 것도 있을 것이요, 지금은 비판이 되는 당시의 어떤 관념에 충실하신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게 그 선조를 숭상하는 것에 하등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 류상운 선조께서 류씨와 차씨는 일가라는 언급을 하며 차문의 첫 족보인 무자보(1708년)의 서문을 써 주었다는 것이 차문에서는 큰 재산인 듯하다. 그러나 이미 그 서문의 저자도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며, 만에 하나 그렇게 써 주셨다 한들, 그것이 지금 와서 차씨와 류씨의 선조가 같다는 증거는 될 수 없음은 바로 위에서 이미 논증하였다. (아들이 좌의정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위조의 주장이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그럴 듯하게 꾸며서 아들에게, '자 이것이 당신 선친께서 써 주신 글이요', 하고 말하면, 아들이 일일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온 것이 아닌 한에는, 받들어 모시지 않을 아들이 있을까.)
- 위 글에는 양문이 1,100년 동안 금혼을 지켜왔다는 주장이 있다. 우선 1,100년은 400여년이라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그 전에는 세상에 없던 류차동원설이 풍미해 온 시간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근거가 있기 어렵다. 우선 기사보 이후의 족보에는 이미 류차동원설이 족보에 박히고 누구나 믿게 되었으니 감히 통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대개 족보 자체가 없었기에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다. 기사보는 1689년에 간행되었고, 차문의 무자보는 1709년에 간행되었다. 그럼 현존하는 문화류씨 최고의 족보인 가정보(1565년)에는 어떨까. 여기에는 류차동원설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가정보는 외손의 외손까지 기록한 만성보(萬姓譜)적인 성격의 족보인데, 인척관계로 車씨가 몇 명 보인다. 차씨가 인구 비례상 낮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또한 당시에는 류문은 세도가문이었으며 차문은 '한미한' 가문이었다. (지금 와서 이런 것을 언급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이며, 필자의 관념과도 맞지 않는 발언이지만 단지 사실로서 적시한다.) 그러니 확률적으로도 류씨의 족보에 차씨가 많이 보일 턱이 없다. 하지만 몇 건이 있긴 있는 것이다. 더 상세하게 살펴볼 기회가 없어 그 차씨들과 류씨들이 직접 혼인한 사이인지는 확인하지 못해서 이 정도로 맺는다. 참고로 2008년의 무자보에도 류씨의 차씨 사위들이 몇 명 올라 있다.
- 부산 기장의 소위 '차릉'은 완전 잘못된 명칭이며 '기장 석총'(碩塚: 큰 무덤), '만화 석총' 등으로 불러야 한다. '차릉'은 고려초에 비로소 생겨나서 역사에 등장한 차씨를 (설원기 등에서) 조작하여 신라 시대로 가문의 역사를 소급하기 위한 물증으로 조작 제시된 위작물이다. 해당 관청에서도 그 무덤을 '문화재자료'로 지정했다가 문제가 있어 해제했다. 그 석총 아래에 설립된 오대단도 모두 가공인물의 비석들이기 때문에 처분되어야 한다. 광주 대동사는 아직도 차문과 류문이 얽혀 있는 부분이 남아 있으나 앞으로 해결하여 차문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한편 이번 차문종보에는 소위 '차릉'의 주인공이라 주장되는 인물의 이름이 車建申인지 車建甲인지에 대한 논의가 다시 다루어져 있던데, 부질없는 일이다. 이 인물 자체가 조작된 것임은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3. "호랑이 설화를 통해 본 차.류 양문의 동원설" - 저자: 차일남
이 글은 호랑이 설화들을 소재로 해서 류차동원설을 지지하고자 쓴 글이다. 그 글의 주석 20번에 설원기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역시 필자(柳)가 설원기의 이본의 다른 점들('약간의 첨삭')만 보고 설원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한다고 호도(糊塗)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까지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 할지 두고 볼 일이다.
위 글은 논리전개 자체에도 모순이 있다. 곧 저자는 차씨와 류씨에게서 호랑이 설화가 많이 발견되고 그를 해석해 보니 차문과 류문이 동원(同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선, 우리나라에는 호랑이 얘기가 많은데, 대승공 시대 이후에 나온 이야기들은 아무리 많아도 류차동원설을 평가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장황하게 곁가지들을 이어 붙여 결론을 오도하고 있다. 논리전개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위 글에서 제시된 '차.류 가문에 관한 호랑이 보은 설화' 중에 선계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 3건이 있는데, 각각 그 주인공이 (1) 차씨, (2) 류차달, (3) 류효금이다.
여기서 우선, 문화류씨 집안에 내려오는 호랑이 설화(호랑이 목에서 비녀를 빼주고 축복을 받았다는 줄거리)는 류문 자체에서도 (2)의 대승공(류차달)과 (3)의 좌윤공(류효금)의 두 버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대승공이 나오는 기록은 일찍이 고려시대의 금석문, 곧 1349년에 세워진 문화류씨의 현조(顯祖)인 류돈(柳墩)의 묘지명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정보(1565년)나 그 이전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비슷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좌윤공의 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전승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을 것이며, 나중 전승이 와전된 것이거나 혹은 앞의 전승이 와전된 것이거나 할 것이다.
그런데 위 글에 언급된 (1)의 차씨 전래 설화는 "류공숙이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꺼내줌. 부친 차승색(류색)의 묘 자리를 잡아 주고 후손이 잘 되도록 함."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위 글의 부록에 그 이야기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좌윤공의 이야기에서 이름만 바꾸고 소설적 묘사를 가미한 것일 따름이며, 그 구체적인 근거도 출처도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그 글에서 참고로 한 문헌 중에 "한중 호랑이 설화 비교연구"(이호주)라는 것이 있는데, 1980년대 전반쯤에 나온 이 자료를 보면 '은혜 갚은 호랑이'라는 연안차씨 설화가 언급되어 있다. "왕건(태조) 때 연안차씨가 호랑이가 애원하여 목구멍에서 비녀를 빼줘서 호랑이가 그 보은으로 산소자리를 잡아줘서 그 후로 몇 대의 정승을 지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설화의 출처를 보면 1979년에 인권환이라는 "한국구비문학대계"의 저자가 충남 당진에서 당시 62세의 차인환이라는 사람에게서 채록한 것이다. 류문과 차문에 내려온 좌윤공(류효금)의 설화를 류씨도 자기 집안이라고 믿은 어떤 차씨가 이야기한 것이 그만 차씨 설화로 둔갑한 것임이 자명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위 글에서는 류공숙이 시대적으로 가장 위이기 때문에 그가 나온 차씨 전래 설화라는 것이 류차 동원의 증거라 제시하고 있으니, 논리의 비약이나 견강부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류공숙(차공숙)이나 류색(차승색)이라고 하는 인물들도 가공된 것임은 이미 판명이 나 있다. 대승공을 차씨로 바꾸는 망동을 하더니 이제는 류문의 호랑이 설화까지 차문의 설화로 바꾸려 하고 있다.
4. "<차원부 설원기>란 어떤 책인가?" - 저자: 차상규
위 글은 설원기가 위서라는 주장 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 논의하며 위서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 설원기의 핵심 부분인 기(記)는 박팽년이 작성했다고 적시되어 있는데, 작성 날짜도 명확하게 밝히면서 스스로를 형조참판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그때 박팽년은 형조참판이 아니었다. 왕에게 바치면서 자신의 직책을 속인 것이 된다.
위 저자(車)는 그런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형조 참판의 직위로 설원기를 편집하였으니 직명을 형조 참판으로 함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언제 그 글을 썼느냐 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모월 모일 형조참판 누구"라고 명기한 사실이다. 아무리 편집 혹은 저술할 때 다른 직책이었다고 해도 어떤 날짜를 밝히면서 그 날짜의 것이 아닌 직책을 명기한 것은 임금을 기망하는 일이라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저자와 날짜를 모두 조작한 것이라는 증거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그 날짜가 사육신 변고 바로 며칠 전이라서 설원기가 사육신 변고와 그 관련자들을 이용해서 저자도 조작하고 내용도 조작하고 있음은 조선의 문신인 홍계희(洪啓禧, 1703년~1771년), 유학자 하진현(河晉賢, 1776-1846) 등을 위시해서 현대의 연구논문들이 일관되게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 응제시의 마지막 저자로 나온 남효온은 실제로는 당시 만 2세였다. 남효온이 조작되었음을 증명하고, 나아가서 다른 응제시와 설원기에 언급된 인물들에 대한 신빙성을 땅으로 추락시키는 대목이다.
그런데 위 저자는 그것을 단지 설원기의 전달과정에서의 착오로 간주하고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과연 그럴까. 남효온은 설원기의 서문에도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남효온은 전달과정에서 착오로 잘못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던 것을 오히려 후대에 오류임을 깨달은 후손들이 새로 설원기를 간행하며 살짝 뺀 것이다. 이는 결코 단순한 오기(誤記)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남효온의 사육신 변고에서의 역할(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상세한 내용은 생략함)을 감안하면 설원기에의 남효온 등재가 적극적인 조작의 증거임은 자명해진다. 그리고 설원기의 응제시 저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문제가 되는 저자들이 남효온만이 아니다. 단편적인 것 하나만 들어 전체를 호도하려 하는 행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 차문에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필자(柳)의 설원기가 위서라는 주장이나 류차동원설이 조작되었다는 주장 때문에 류차 양문의 관계가 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일찍부터 인터넷을 이용해서 일정 역할을 해온 부분은 있지만, 이런 일을 필자가 혼자 해왔다거나 필자가 주도해왔다는 등의 말은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문화류씨대종회의 임원도 아니고 여하한 류씨와 마찬가지로 그 일원일 따름이다. 그런 말을 하는 차문 분들께서는 문화류씨대종회의 종보("유주춘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 아니면 대동보(2008년 무자보)나 문화류씨의 인터넷 공식 사이트나 대전뿌리공원의 유래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 되묻고 싶다. 류차동원설이 거짓임은 어떤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문화류씨 문중의 공식 입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설원기나 차식의 신도비나 기사보 등의 문헌에서 언급된, 집안 차원에서 '류씨와 차씨가 일가'라는 취지의 구절들 말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언급한 것으로서 필자가 확인한 최초의 것은 차운로의 시에서 나왔다. 차식은 필자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아서 그 분의 글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대략 설원기의 위작자는 아닐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차천로의 글은 "오산설림"과 "오산집"을 검토해 본 적이 있는데, 류씨를 대상으로 시를 쓴 것이 수 편 보이지만 류차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찾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는 자기 윗대나 친지의 행장이나 묘비명 등이 흔히 들어 있어 그 문집의 저자가 스스로 자신의 출처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차천로의 "오산집"에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설원기의 위작자를 완전하게 어느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으로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타당한 추정은 해 볼 수 있다. 그것이 위서라면 누군가 박팽년, 하위지, 남효온 등등의 이름을 빌려 조작한 사람이 있을 터인데, 그 시기나 능력이나 당시의 집안 상황 등등을 고려하면 차천로(오산공)가 가장 유력한 조작자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조선왕조실록의 부정적인 성품이나 행실에 관한 여러 차례의 묘사도 그 추정의 근거 중 하나로 들어간다. 이런 추정에 대해 특히 오산공의 후손들의 반발이 극심한데, 설원기의 위작자는 차씨가 아닐 수 없으므로, 차문에서 누구 다른 사람을 위작자로 특정해서 제시한다면 또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무작정 반발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 그렇게 오산공의 위작자 추정 이상의 타당한 추정이 제시된다면 얼마든지 필자의 추정을 비난해도 감수하겠으나 아무런 근거도 대안도 없이 무작정 차문 조상에 대한 폄훼라 주장한다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산공은 문장가로 추앙받아 온 인물이다. 필자가 그를 논의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접근은 전무하며 이는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한편 위 글에서는 설원기가 1586년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1586년에 차천로는 약관 30세였기 때문에 설원기를 조작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설원기는 1583년(필자가 확인한 구봉령의 "백담집"에 실린 관련 글의 작성 연대임) 이전에 세상에 존재했다. 따라서 이즈음에 설원기가 조작되었다고 추정되는데, 1583년에 차천로는 28세였다. 그의 비범한 재능을 고려하면 이때는 그가 설원기를 짓고도 남을 시기이다. 위 글의 저자는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다. 위작자 추정에 대한 것도 다른 곳에서 상세히 밝혀 놓았기에 더 이상은 생략한다.
- 위 글에서는 "일성록"의 기사들을 별일이 아닌 듯이 서술해 놓고 있다. 심지어 "일성록"에 나온 "단종조에 시호를 하사하라는 명을 입었기에 이르렀으나"라는 문구는 상언(上言)문(文) 곧 상언자들의 글귀일 따름인데도 조정(정조와 해당 관청)의 발언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 어떤 교묘한 논리로도 상소의 주장, 곧 설원기의 내용, 더 의미를 확대하면 곧 설원기 자체가 '상고하여 믿을 수 없다'는 "일성록"의 평가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임은 확실하다.
차문에서는 "일성록"에 차원부의 이름이 나온다고 차원부의 행적의 증거인 양 말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불성설이다. 일성록에 나온 기사에서는 차원부의 행적을 들어 나라에서 시호를 내려달라는 민원을 조정에서는 믿을 수 없다고 세 차례나 거절하고 있다. 이로써 그 행적은 확실하게 부인되는 것이며, 그것이 조작되었다면 심지어 차원부의 존재 자체도 의심받을 수 있다. 실제 차문에서 주장되는 차원부의 과거급제는 근거가 없고 관력도 그 관직들의 명칭에서조차 모두 의심된다(참조: "한국사학"의 박은정 논문, 2010년; 232, 238, 239 페이지).
더 심한 것은 실록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며 그의 행적이나 존재의 근거로 삼으려는 발언이다. 그 사실을 처음 찾아낸 필자에게 감사라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세상에 그런 억지도 없다. 실록에는 한 상소문의 구절에서 성(車)도 없이 '원부'라는 이름만 나온다. 실록은 심지어 역적이나 도적, 나아가서 일개 필부라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위서(僞書) 설원기에 속은 유학자들이 사실이라 믿고 상소를 하면서 그 책의 구절을 하나 따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하게 말하면 목이 잘려 나온 이름을 가지고 더 이상 견강부회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대부분은 이미 더 상세하게 여러 곳에서 밝혀 놓은 것이라 반복일 따름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억지 주장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차문종보의 류차동원의 주장이나 설원기가 위작이 아니라는 주장은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대신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그 일부 자체도 대개 오류이다. 예를 들어 위의 4번째에 다룬 글에서 박은정의 논문(2010년)의 일부 내용을 설원기가 위작이 아니라는 증거로 삼으려는 부분이 보이는데, 설원기의 위작 여부보다는 설원기가 어떻게 유통되고 확산되어 갔는지를 주로 다루는 이 논문에서도 설원기가 위작이라는 말을 여러 군데에서 하고 있고 그 상세한 근거들도 제시하고 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극히 일부의 구절을 자신의 주장에 맞추기 위해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한편 이 논문도 필자가 차문에 소개해 준 것이다.
필자 역시 처음 설원기를 접하고 나서 그 현란한 모습에 압도되어 최소한 일부라도 진실은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양파를 까듯 보이는 잘못을 한 꺼풀 벗기고 나면 또 다른 잘못이 보이기를 반복했다. 특히 가계를 꾸며내고 가문을 높이려 하륜을 포함한 '4얼'들을 조작한 흉악함에 이르러서는 악취가 느껴졌다. 차원부를 죽였다는 그 4명 중에는 그들이 차원부를 참혹하게 살해했다는 그 시점에 이미 죽어 있는 사람들이 2명이며, 출신 논란이 조금이라도 있던 사람은 정도전뿐이었다. 설원기는 거짓이 진실을 난도질하는 유령들의 놀이터일 따름이다. 필자의 연락으로 하륜이 차문에게 얼마나 그릇되게 매도당해 왔는지를 인지하게 된 하륜의 진양하씨 문중도 종보에서 특집으로 하륜에 대한 설원기와 차문의 조작에 대응할 예정이라 들었다.
설원기는 "일성록"의 단정적인 평가대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문헌이며,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남을 짓밟고 왜곡도 서슴지 않는 이런 악서(惡書)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설원기에 류차동원설이 등장했고, 설원기가 세상에 등장한 것과 같은 시기에 출처가 의심스러운 두어 건의 사료가 세상에 떠돌아, 그 설은 급기야 류문의 족보에까지 들어가고 최근까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믿어왔다. 대저 그 악의 뿌리는 깊기만 하다. 류차동원설은 그 태생부터 잘못이고 그 설이 지배해온 400여년 이전의 700여년 동안에 그 증거가 전무하여 이제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끔 되어 버렸다. 그 잘못을 류문에서 구체적이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지 벌써 수 년째이다. 그동안 차문의 식자(識者)들의 양식에 기대해서 진실의 목소리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제 막 나온 차문종보를 보니 탄식이 앞설 따름이다. 부디 사안을 폭넓게 보기를 바라고, 무조건 조상을 부풀리고 심지어 조작해 내는 것이 조상을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 길이 아니고 오히려 남은 가치마저 파괴하는 심각한 일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진실과 사실 여부의 관점에서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만 접근할 따름이며, 결코 개인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역사 왜곡의 주체로서 차문을 이야기할 때도 그런 왜곡을 저지른 몇몇 개인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이 점에 대해 특히 차씨 여러분께서 깊은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위에 논의한 네 글의 저자 분들에 대해서도 종사에 애쓰시는 점에 대해 삼가 존중하며 다만 무엇이 정당하고 올바른 것인지를 논해본 것이다. 필자의 논의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부디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차문에서는 무조건 류문의 주장을 극력 배척해왔는데 이번 종보를 보니 일부 류문의 제시 가운데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부분도 보여 변화의 조짐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 차문종보 등에서 류문을 비난하며 역사의 정도(正道)로 걸어 나오기를 바란다는 표현을 누차 했는데, 과연 차문이 역사의 정도로 걸어 나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1. 2. 26. 彩霞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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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1/02/27 10:18:51
글제목 세와 대
질문/답변 게시판에 올라온 관련 글을 보고 이 글을 씁니다.
세와 대의 문제는 간단하지는 않고, 여러 차례 이런 논의가 나왔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5대조는 '고조의 아버지'의 뜻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실상 세와 대는 그 뜻의 차이가 없는 글자들인데, 처음부터 셀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어떤 위치를 기준으로 그 위 아래를 언급할 때는 혼돈이 있어왔습니다.
그 해결방법의 첫째는 세와 대를 구별 없이 사용하며, 위 아래로 셀 때 당사자를 포함하는 방법입니다. 앞글에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방법에 의하면, 1. A, 2. B, 3. C, 4. D, 5. E, ...가 있을 때, A는 C의 3세(대)조이고, E는 C의 3대(세)손입니다.
둘째는 여러 종중에서 관습적으로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방법입니다. 이 방법에서는 위로 셀 때는 자신을 빼고 '대조'를 붙이고('세조'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아래로 셀 때는 당사자를 넣고 '세손'을 붙입니다. 이 방법에 의하면 A는 C의 2대조이고, E는 C의 3세손입니다.
셋째는 성균관에서 주장한 것인데, 세와 대를 구별 없이 사용하되, 위 아래를 호칭할 때 모두 당사자를 제외합니다. 이때는 A는 C의 2세(대)조이고, E는 C의 2세(대)손입니다.
이들에 대해 토론해 보면, 우선 다음과 같은 전제가 제시될 수 있습니다.
(1) 우리말 표현으로 "A는 C의 두 번째 조(祖)이다.", "E는 C의 두 번째 손(孫)이다."라는 표현들은 아무런 오해의 소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명확함을 한문에서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2) 世와 代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世는 원래 十자가 세 개 들어 있는 글자이며, 30년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 대략 30년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나온 글자입니다. 반면에 代는 人+弋(주살 익)에서 나왔는데, '익'은 줄에 매단 화살로서 '교대'하는 표시로 썼습니다. 대신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代는 원래, 좀 어렵게 표현하면, 각 사람의 존재로 구별되는 인간 삶의 단위를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실제로 世와 代를 구별하여 쓰기 어려워 실상 같은 뜻으로 봐야 합니다. 단, 世는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까지 대략 30년이 걸리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 아래쪽으로의 뉘앙스가 代보다 강합니다.
(3) A를 기준으로 해서 아래로 따질 때는 세와 대를 구별하지 않고 차례대로 1대(1세), 2대(2세), 3대(3세)...로 부르는 것에는 무리가 없고, 위의 세 방법이 여기에는 동의합니다. 문제는, 이때 2세(대), 3세(대), ...를 A의 후손이라는 의미를 붙여 2세(대)손, 3세(대)손, ...이라 부르는 경우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세(대)는 당사자이니 '손'자를 붙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대승공을 1세로 하여 桓자 항렬이 36세인데, 이때 "문화류씨 36세(대)이다."는 타당한 표현이며, 여기에는 '손'의 개념이 약하여 "문화류씨 36세(대)손이다."고 하면 어색합니다. 그런데 간혹 문화류씨의 의미로 대승공을 쓰기도 합니다. 수사학에서는 환유법 혹은 대유법이라고 하며, 특히 문중 내에서 서로를 표현할 때 쓸 수 있습니다. 이때는 "대승공 36세(대)이다." 혹은 대승공의 자손이므로 강조하여 "대승공 36세(대)손이다."라고 쓸 수 있습니다. 위의 A, B, C, ...의 경우, "C는 A公(=1세)의 3세(대)손이다."가 되는 것이지요.
(4) 세와 대는 의미상 아래로 내려갈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세와 대는 후손을 낳음에 따라 아래로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래는 위쪽 방향으로는 세이건 대이건 붙이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과제는, 위쪽으로 첫 번째, 두 번째, ... 등의 조상을 지칭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이때 어떻게 써야 적절한가 하는 점이며, 이것이 세와 대의 논의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상의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방법과 셋째 방법은 비중이 동일하며, 동일한 정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아래쪽으로 셀 때 기준이 포함되는 것이 자연스러우니 위쪽으로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 첫째 방법의 취지이고, '세(대)조'와 '세(대)손'에서 '조'와 '손'을 붙이려면 기준을 포함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으니 기준을 제외하고 세자는 것이 셋째 방법의 취지입니다. 모두 그럴 듯합니다.
위쪽과 아래쪽으로 셀 때 달리하는 둘째 방법에 대해서는, 이 방법도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곧, 世의 원래 의미상 그 말을 쓸 때 한 인간이 자식을 낳을 때까지의 시간을 감안하는 것입니다. 이때 C를 기준으로 하여 아래쪽으로 D는 C의 1世(30년)가 있어야 생기므로 D는 C의 2世가 됩니다. 반면에 위쪽으로 B를 이야기할 때는 C의 1世(30년)가 반드시 전제되는 것은 아니고 거꾸로 B의 1世(30년)가 있어야 C가 생기므로, B가 C의 1世가 되고, 조상임을 명기하여 1世조가 됩니다. 여기서 원칙적으로 世는 아래쪽으로 써야 하고, 世가 '30년'의 원뜻을 가져 그것이 강하므로 이것을 사용하지 말고 그런 뉘앙스가 적은 代를 사용하여 1代祖(=아버지)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로 셀 때는 자신을 빼고 '대조'를 붙임('세조'라는 말은 쓰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면 언어의 사용이 명확해 집니다.
첫째 방법에서는 위쪽으로 셀 때 기준을 1세(대)로 부르는 것은 아들이 1세(대)고 아버지가 2세(대)라고 하는 것이어서 어색합니다. 물론 일관성 있게 거꾸로도 그렇게 생각하자 라고 하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만 그런 인식을 얼마만큼 퍼뜨릴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방법은 후손이 자기를 지칭할 때, 예를 들어 '대승공(=1세) 36세', '충경공(=1세, 대승공 14세) 23세(대승공 36세)'를 자신이 후손임을 강조해서 '대승공(=1세) 36세손', '충경공(=1세) 23세손'으로 부르는 것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이것도 이런 경우 '세(대)손'이란 말은 혼동이 되니 쓰지 말자라고 주장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만, 자연스런 언어 사용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예외 없이 첫째 방법으로 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설혹 중국에서 그렇게 쓴다 해도 우리 관습이 반드시 중국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이를 세는 방법과 서양의 그것이 달라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듯이, 우리는 우리 관습에 따른 호칭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워낙 집안에서 둘째 방법으로 교육을 받아와서 여전히 그렇게 쓰고 있고, 족보도 살펴본 적이 있는데, 대략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문제지만 깊이 들어가면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논리상 어느 특정한 것이 우세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 간의 합의와 대세(大勢)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혹시 논의에 더 포함시켜야 할 다른 중요한 전제요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2011. 2. 27. 彩霞 류주환
PS. 둘째 방법에 따른 용례: (예전에 비슷한 글을 썼는데 위의 논의에 따라 약간 수정한 것임)
- 나는 문화류씨 36세이다. [맞음.]
- 나는 문화류씨 36세손이다. [틀림. '손'을 붙일 이유가 없어 틀린 용법으로 보아야 함.]
- 나는 대승공 36세이다. [이것은 대승공 '집안'의 36세 사람으로 볼 수 있으나 '대승공'을 쓰면서 '손'자로 겸양하지 않는 어색한 어법임.]
- 나는 대승공(=1세) 36세손이다. [대승공에서 간격이 36세 떨어진 자손이 아니라 대승공을 1세로 한 36세의 사람으로서, 대승공의 후손임을 강조한 어법. 대승공 집안의 36세의 후손. 여기서 '대승공'은 '문화류씨'를 의미. 일종의 대유법(代喩法)임. '세손'은 기준을 1세로 보고 따지는 것이라고 정의.]
- 나는 대승공의 35번째 자손(후손)이다. [맞음. 대승공의 후손 중에서 35번째.]
- 대승공께서는 나의 35대조이다. [맞음. '대조'는 자신을 제외하고 계수(計數). 이때 '세조'라는 말은 '세'(30년)의 원의미와 어울리지 않으므로 맞지 않음.]
- 대승공께서는 나의 35번째 조상이다. [맞음. 나의 '조상' 중에서 35번째.]
- 나는 충경공파 23세이다. [충경공 = 문화류씨 14세]
- 나는 충경공파 23세손이다. ['손'을 붙일 이유가 없어 틀린 용법으로 보아야 함.]
- 나는 충경공(=1세) 23세손이다. [충경공을 1세로 하는 충경공파의 23세인 사람.]
- 나는 충경공(=1세)의 23세손이다. ['세손'은 기준을 1세로 보고 따지는 것.]
- 나는 충경공의 22번째 후손이다. ['22번째'는 '후손'을 수식함.]
- 충경공께서는 나의 22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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